삼성 류중일 감독은 부상 관리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다.
"멀쩡한데도 시합을 못 뛰는 선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픈 선수가 굳이 왜 시합을 뛰어야 합니까. 작은 손톱 하나 아파도 못하는게 야구잖아요. 아프면 잘 관리하고 회복된 뒤 뛰어야죠."
하지만 15일 잠실 두산전을 앞두고는 이런 말을 했다. "예전 백인천 감독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에요. 일본 포수 한명이 손에 금이 간채로 부상을 숨기고 주전으로 계속 뛰었다는군요. 자리를 비운 사이 주전 자리를 빼앗길까봐서요. 그만큼 자기 자리를 지키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포지션은 함부로 비워주면 안되요. 그러려면 그만큼 평소에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얼핏 상반돼 보이는 이야기. 하지만 맥락을 살펴보면 메시지는 하나다. 프로다운 철저한 자기 관리에 대한 주문이다. '부상은 자기 관리 실패의 결과→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빼겠다→자리를 비운 사이 주전이 바뀔 수도 있다'는 강력한 화두를 언론을 통해 선수단에 던지고 있는 셈이다.
류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태연하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비상 사태에 대비해 준비된 백업층, 플랜B가 제대로 가동하는 안정된 시스템 덕분이다. 각 팀 사령탑들은 '재난 사태'에 대비한 시스템을 미리 갖추려 노력한다. 단기간에 현실적으로 쉽게 해결되는 과제가 아니다. 1년차 사령탑 넥센 염경엽 감독은 "시즌 중 주요 선수의 부상 이탈에 대비한 라인업을 전지훈련 기간 동안 여러 각도로 가동해봤다. (이 시뮬레이션은) 어쩌면 우리 코치들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주요 선수 1명 정도가 빠질 경우 큰 무리 없이 갈 수 있다. 하지만 2명 이상 빠지면 조금 골치가 아플 것 같다"고 말한다. 부상은 장기 레이스를 소화애햐 하는 선수 개인이나 팀에게 모두 가장 중요한 변수이자 으뜸 관리대상이다.
최근 8연승으로 일찌감치 선두로 치고 나온 삼성. 그들의 현재는 어떠한가. 삼성도 핵심 부상 이탈자가 있다. 불펜의 핵 잠수함 권오준이 수술로 사실상 시즌을 접었고, 베테랑 우익수 박한이도 오른 손목 통증으로 빠져있다. 하지만 '제2의 임창용'이라 불리는 심창민과 이적생 신용운이 권오준의 빈자리를 소리 없이 메우고 있다. 심창민은 15일 현재 9홀드로 이 부문 공동 1위. 박한이의 공백 메우기는 정형식의 몫이다. 공-수-주 3박자를 갖춘 출중한 기량에도 불구, 포화 상태의 외야진이란 구조적 문제로 백업으로 돌던 선수. 붙박이 2번 우익수로 출전하면서 쌓인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하고 있다. 14,15일 잠실 두산전에서 각각 2안타와 3안타를 날리며 톱타자 배영섭과 함께 대량 득점의 물꼬를 텄다. 찬스메이킹 뿐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 알토란 같은 적시타로 해결사 노릇까지 해냈다. 공-수에 걸쳐 폭발적인 주력도 정형식 아이덴티티의 주요 요소. 안팎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알린 2경기. "마음 편하고 기분 좋게 경기 임하고 있다"며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다. 야수층이 두텁지 못한 타 팀 입장에서 정형식의 활약을 보면 '저 선수가 백업이야?'라는 말과 함께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긴 시즌을 치르다 보면 피할 수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인 부상. 시각을 뒤집어 보면 긍정적 효과가 전혀 없는건 아니다. 만년 주전 선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백업 요원이 경기 출전 속에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주전 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우. 원래 주인이 부상에서 돌아온 이후 경쟁 구도가 형성되면서 해당 포지션에 활력이 생기고 팀은 더 강해진다. 드물지만 부상의 선순환 효과다. 현재 삼성이 꼭 그렇다. 하지만 타 팀이 '삼성 선수층이 두텁다'고 무작정 부러워 할 일은 아니다. 장기적 안목에서 오랜 시간이 투자된 결과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