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 투수와 한참 대화를 나누는 장면, 야구에선 익숙한 풍경이다. 도대체 무슨 얘길 나눌까.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 궁금증을 가져봤을 문제다.
롯데 김시진 감독이 재밌는 답을 내놓았다. 김 감독은 짧은 현역 시절, 10년 동안 통산 124승을 올린 명투수 출신이다. 83년 데뷔와 함께 6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렸고, 85년(25승)과 87년(23승) 두 차례나 20승 투수가 됐다. 소위 말하는, '밥 먹듯' 마운드에 올랐다.
은퇴 이후엔 투수코치로 현대 왕조를 이끌었다. 정민태 정명원 등 또다른 명투수들을 만들며 '투수조련사'로 명성을 떨쳤다. 투수 파트에 있어서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의 얼굴만 봐도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잘 아는 사람이 김 감독이다.
15일 부산 사직구장. 김 감독은 NC와의 홈경기를 앞두고 전날 경기를 복기하다 "올시즌 처음 마운드에 올라가 봤다"라고 말했다.
상황은 이렇다. 14일 경기서 롯데가 2-1로 앞선 9회초, 마무리 김성배가 등판했다. 김성배는 선두타자 지석훈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허용했다. NC 선수들이 덕아웃에서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김시진 감독이 묵묵히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교체는 아니었다. 김 감독은 몇 마디를 건넨 뒤 다시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보통 투수교체 혹은 마운드에 올라가 투수와 대화를 나누는 건 투수코치의 몫이다.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갈 땐, 남다른 의미가 있다. 마운드에 선 투수도 투수코치가 올라올 때와 감독이 올라올 땐 큰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
김 감독은 "사실 한 타이밍 끊고 싶어서 올라갔다. 성배한테 '넌 세이브 투수다. 블론세이브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부담 갖지 마라'고 말한 뒤 내려왔다"고 밝혔다.
결과는 100% 만족스럽진 않았다. 김성배는 내야안타와 희생번트로 1사 2루 상황을 만든 뒤 나란히 배치된 좌타자들의 타순이 시작되자 마운드를 좌완 이명우에게 넘겼다. 하지만 감독의 한 마디는 당시 게임 만을 겨냥한 건 아니었다. 앞으로 롯데 마운드를 이끌어가야 할 마무리 김성배에게 더 큰 힘이 됐을 것이다.
김 감독은 오랜 투수코치 경험을 토대로 마운드에 올라가 하는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그는 "사실 올라가서 크게 할 말이 없다"며 웃었다. 무슨 뜻일까.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갈 땐, 투수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뜻한다. 갑자기 난타를 당한다거나, 볼-볼-볼을 연발하며 제구가 안돼 주자가 쌓이는 경우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있다.
김 감독은 "볼만 던지면 뭐라고 해야되는 줄 아나. 올라가서 '야, 그냥 치라 그러고 밀어붙여. 오늘 경기는 됐으니까 빨리 가자. 내일 이기면 된다'고 말한다"고 했다.
투수코치가 그냥 맞고, 경기 포기를 연상시키는 발언을 한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김 감독은 "본인은 스트라이크 안 던지고 싶어서 안 던지나. 본인도 미치는 상황인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지적하면, 나가서 불 지르는 것밖에 안 된다"고 설명했다.
본인도 투수로서 겪은 경험이다. 아무리 잘 던지는 투수도 갑자기 스트라이크가 안 들어갈 때가 있다는 것. 결국 '맞아도 된다'는 식으로 긴장을 풀어줘야 겨우 돌파구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부산=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