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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앤서니, 타자 변신의 속사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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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외국인 투수 앤서니가 타석에 들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15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KIA-SK전에서 나온 희귀하고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이날 두 팀은 3-3으로 정규이닝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연장전에 돌입했다. 그런데 KIA의 10회말 공격 때 선두타자로 9번 타순에 있던 외국인 투수 앤서니가 나온 것이다. 앤서니는 SK 박희수와 만나 볼카운트 1B2S에서 헛스윙 삼진을 당하며 돌아섰다. 관중들은 큰 박수로 앤서니를 격려했다.

▶왜 앤서니가 타석에 나오게 됐을까

앤서니가 10회말 선두타자로 나오게 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KIA의 8회말 공격부터 따져봐야 한다. 1-3으로 끌려가던 KIA는 7회말 2점을 뽑아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8회말 선두타자로 나온 7번 포수 차일목이 안타를 친 뒤 대주자 고영우와 교체됐다. 8번 박기남의 희생번트로 1사 2루가 됐고, 여기서 KIA 벤치는 9번 1루수 홍재호 타석 때 대타로 김원섭을 투입했다.

그러나 김원섭이 중견수 뜬 공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계속된 2사 2루에서 이용규가 기습 번트로 내야안타를 만들며 2사 1, 3루가 됐지만, 2번 김선빈이 투수 앞 땅볼로 물러나며 이닝이 끝났다.

9회초 KIA의 수비가 시작되기에 앞서 대타와 대주자로 교체된 포수와 1루수를 채워야 했다. 포수 차일목을 대신해 나간 주자 고영우는 벤치에 대기 중인 포수 김상훈으로 교체하면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루수가 문제였다.

남은 야수 중에서 1루 수비를 맡을 인물이 없었던 것. 내야수 중에서는 윤완주가 남아있었지만, 1루 수비가 익숙치 않다. 또한 윤완주는 9회말 혹은 연장 때 대주자나 대타로 쓰는 편이 낫다.

그래서 KIA 벤치는 고심끝에 이날 지명타자로 나간 최희섭을 다시 1루수로 돌렸다. 이렇게 되면서 지명타자가 사라졌다. 때문에 9회초 수비를 하려면 투수가 어쩔 수 없이 타순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8회초 1사 후 등판한 신승현이 어쩔 수 없이 김원섭 대신 9번 타자 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9회초 수비 때 마운드에 올랐다.

9회초 SK의 공격이 무득점으로 끝나고 드디어 9회말이 됐다. 1점만 내면 경기를 끝내는 상황에서 3번 타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9번 타순까지 타석에 나올 가능성은 없다. KIA 벤치도 이런 가능성을 노리고 신승현을 9번 타순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KIA는 9회말 무사 만루 찬스를 잡아놓고도 후속 세 타자(6~8번)가 우익수 뜬 공과 연속 삼진을 당하며 경기를 끝내지 못했다.

연장에 돌입하게 된 탓에 결국 투수가 타석에 나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 나오게 됐다. 연장 10회초 수비 때 KIA는 투구수가 많아진 신승현을 빼고, 앤서니를 올렸다. 필승의 의지다. 그러나 앞선 상황에 의해 앤서니의 이름은 9번 타순에 올라갔다.

그리고 이어진 연장 10회 말. KIA의 공격은 9번 타자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1이닝 밖에 던지지 않은 앤서니를 대타 윤완주로 바꾸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KIA 벤치는 아웃카운트 1개를 감수하고서라도 앤서니를 타자로 내보내게 된 것이었다.

▶우투좌타 앤서니,

이런 복잡한 과정 끝에 앤서니는 10회말 선두타자로 나서게 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앤서니가 타석에 들어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에 KIA 덕아웃에서는 작은 촌극이 벌어졌다.

우선 타자로 나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장비가 없었다. 배트는 물론이거니와 헬멧이나 배팅 장갑도 없는 앤서니다. 게다가 특이하게 앤서니는 우투 좌타다. 메이저리그 LA다저스의 류현진과는 정반대다. 공을 던질 때는 오른손으로 던지지만, 칠 때는 왼손 타석에 나오는 유형이었다.

결국 앤서니가 타석에 나가기에 앞서 동료들과 코칭스태프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앤서니에게 맞는 장비를 여기저기서 구해오고, 착용하는 것까지 도와줬다. 정회열 배터리 코치가 허탈한 미소를 지은 채 장비 착용을 도왔다. 결국 앤서니는 체형이 비슷한 최희섭의 헬멧과 배팅 장갑을 착용하고, 배트는 이범호에게 빌려 들고 나왔다. 이를 바라보는 KIA 벤치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주섬주섬 장비를 걸치고 나온 앤서니가 드디어 타석에 들어섰다. 상대는 SK의 필승 마무리 박희수. KIA 벤치도 앤서니의 타격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초구가 어이없는 볼이었다. 관중석에서 작은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박희수 역시 당황스러웠던 듯 했다. 다시 집중한 박희수는 2구와 3구는 스트라이크로 꽂아넣었다.

삼진이 예상되던 4구째. 그런데 여기서 앤서니가 박희수의 공에 거침없이 방망이를 돌려 파울을 만들어냈다. 얌전히 서 있다가 들어올 것 같던 앤서니가 힘차게 방망이를 돌리며 박희수의 공을 걷어내자 관중석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앤서니!"를 연호하는 외침도 들렸다.

이를 지켜보던 KIA 벤치에서도 박수와 함성이 솟구쳤다. KIA 선수들은 크게 웃으며 앤서니에게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앤서니가 박희수의 공을 안타로 만드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결국 앤서니는 5구째 헛스윙 삼진을 당한 채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런 앤서니를 향해 관중과 KIA 선수단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한국 무대에서는 처음으로 타석에 나왔지만, 앤서니에게는 사실 타석에 나오는 게 낯설기만 한 일은 아니다. 일부 마이너리그에서는 지명타자 제도가 없어서 투수도 타석에 나오는 데다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도 지명타자 제도가 없다.

앤서니는 "가장 최근에 타석에 들어섰던 것은 2011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소프트뱅크에서 뛸 때였다"면서 "마이너리그 시절에는 자주 타석에 나와서 2할대 타율을 기록했었다. 그래서 타석에 서는 두려움은 없었는데, 오늘은 벤치에서 타격하지 말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다"고 밝혔다. 만약 강공 지시가 있었더라면, 조금 더 호쾌한 앤서니의 타격을 볼 수 도 있었을 듯 하다.

광주=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