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캠프, 혹은 전지훈련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고국의 혹한을 피해 따뜻한 나라로 날아가 구슬땀을 흘리는 선수들. 가끔은 '지옥훈련'이란 말도 나온다. 이처럼 스프링캠프는 이를 악물고 일년 농사를 준비하는 '전투적인' 시간이다.
당연히 팬들과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타지에 있는 선수들과의 물리적 거리 뿐만이 아니다. 비시즌은 야구팬들에게 '인고의 시간'이고 동시에 '지루한 시간'이다.
각 구단들은 스프링캠프 참관단을 모집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팬투어는 여행사와 연계해 판매하는 '상품'의 성격이 강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백만원이 넘는 비용은 분명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에 처음 직행한 류현진을 취재하면서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의 뜨거운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관찰한 결과, 야구팬들에겐 이만한 '천국'이 없다.
류현진의 소속팀 LA 다저스의 경우,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에 위치한 카멜백랜치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애리조나 내에서 두번째로 넓은 훈련장이다. 방대한 훈련장 곳곳엔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 미디어가 통행하는 길 주위로 통제선이 쳐져 있다.
통제선 바깥은 팬들의 공간이다. 훈련장 주위에도 온통 잔디가 깔려있어 소풍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프레지던트데이(2월 셋째주 월요일) 연휴였던 이번 주말에는 가족 단위 팬들로 훈련장이 가득 찼다. 야구를 좋아하는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훈련장에 놀러와 좋아하던 선수를 보고 사인까지 받는, 자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해주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현지시간으로 일요일이었던 18일(한국시각)에는 훈련장 바로 옆에서 토미 라소다 고문(전 LA 다저스 감독)의 '즉석 테스트'가 진행되기도 했다. 대상은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꼬마들이었다.
유아용 다저스 유니폼을 위아래로 맞춰 입고, 작은 야구화까지 신은 '베이스볼 키드'였다. 가족과 함께 물렁물렁한 '안전구'를 조그마한 배트로 치면서 놀고 있던 이 아이가 라소다 고문의 시야에 들어왔다.
라소다 고문은 아이의 부모에게 "야구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싶다"는 말을 건넸다. 잔디밭에서 천진난만하게 미니배트를 휘두르다 라소다의 눈에 든 것이다. 꼬마아이는 스윙부터 피칭, 수비까지 분주히 움직였다. 수십분간 그렇게 뛰놀고 라소다 고문과 기념 사진까지 찍었다. 이 아이에겐 훗날 어디서든 자랑할 만한 추억이 됐을 것이다.
팬들은 훈련시간 전후론 사인받는데 열을 올린다. 물론 야구공만 수십개 가져와 톱스타들의 사인을 받아내 인터넷에 올려 파는 '불순한' 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순정파'들도 있다.
이들은 준비가 철저하다. 야구공은 여기선 가장 기본적인 준비물이다. 배트나 헬멧 등의 야구용품은 물론, 과거 그 선수가 등장한 신문이나 잡지를 스크랩해오기도 한다. 이런 팬들의 열정을 보면, 메이저리거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혹은 훈련강도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체로 많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려고 한다. 특히 어린이팬의 경우 보다 수월하게 사인을 받기도 한다.
이날 훈련에선 현장에 있던 수백명의 팬들이 단 '한 사람'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바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좌완투수, 그리고 다저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인 샌디 쿠팩스였다.
쿠팩스는 훈련이 끝나갈 때 쯤, 구장에 나와 선수들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류현진과도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라운드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 끝나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가는 길은 사인을 받기 우해 몰려든 수백명의 팬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통제선 너머로 수많은 손이 나와 "샌디!", "샌디!"를 외쳤다.
사실 쿠팩스가 언제 등장하는 지는 공개된 적이 없다. 새 구단주 그룹의 요청에 의해 구단주 특별 고문으로 임명돼 스프링캠프에서 선수 지도에 나설 것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팬들은 쿠팩스가 이날 등장한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처럼 준비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수백명의 팬들이 몰려들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그의 사인을 받고자 했다. 옛날 잡지를 깨끗하게 스크랩해온 팬, 명예의 전당에서 출간한 서적을 갖고 온 팬까지. 전설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은 '경외심'에 가까웠다.
팬 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가족들도 자유롭게 놀러온다. '게스트' 아이디를 받고 훈련장 바로 곁에서 가족이 뛰는 모습을 생생히 느낀다.
모두가 어우러질 수 있는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아직까진 '딴나라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우리도 팬들이 즐길 수 있는 스프링캠프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3월에 따뜻한 남쪽에서 열리는 진짜 '스프링'캠프, 팬들이 즐길 수 있는 그런 자리가 필요하다.
글렌데일(미국 애리조나주)=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