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 같았던 20대를 지나 어느덧 서른의 문턱. '소녀장사'라 불렸던 아이돌 스타였고 인기 로맨스 드라마의 '캔디' 같은 여주인공이었던 윤은혜에게 조금 특별한 스물아홉의 시간이 시작됐다. 윤은혜는 "예전엔 작은 오해라도 생길까 두려워 조심스러워했지만 마음을 내려놓으니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젠 방황과 일탈을 즐기고 싶다"고도 했다. 자신을 긴장시켰던 주변의 시선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모습이었다.
윤은혜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건 MBC 드라마 '보고싶다'의 영향이 크다. 잠 못 이뤘던 첫 촬영, 마음처럼 캐릭터 표현이 잘 되지 않아 눈물을 터뜨렸지만, 마지막 촬영에선 모든 힘을 쏟아붓고 병원 신세까지 졌다. 이런 노력은 시청자들이 먼저 알아봤다. 스스로 "연기력 논란을 달고 살았다"고 했지만 이 작품에선 '윤은혜의 재발견'이란 칭찬이 이어졌다. 앞으로의 연기 세계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이 들면 교복 입는 학생을 연기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어릴 때는 그 나이에 가장 잘 맞는 연기를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빨리 서른 살이 되고 싶었던 것도, 제가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 더 많아질 것 같은 기대 때문이에요. 30대가 돼서 30대 캐릭터를 연기하면 더 어울릴 테니까. 20대와 30대의 중간에 섰을 때 '보고싶다'를 만났죠. 제게 위로가 되어준 작품이에요."
어릴 적 성폭행을 당한 상처를 간직한 '살인자의 딸' 이수연. 고통스러운 과거를 밝은 웃음 뒤에 숨긴 캐릭터가 만만치는 않았을 터. 윤은혜는 "성범죄라는 소재가 예민하고 조심스러웠지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역에서 성인으로의 연결과 그 사이 14년간의 캐릭터 변화를 모두 표현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아역 시절과 똑같은 대사가 나오면 그 장면을 매번 다시 찾아봤을 정도. "감각이나 기억으로 연기하면 디테일을 놓칠 수 있고, 그러면 시청자들과 공감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도 아역들의 빼어난 연기력은 어깨에 짐을 하나 더 얹어놓은 것처럼 부담이 됐다고 한다.
윤은혜의 부담을 가중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박유천과 유승호. 멋진 두 남자의 사랑을 받으니 질투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박유천은 가수로 시작해서 그런지 센스가 좋아서 연습 없이도 연기호흡이 꽤 잘맞았죠. 승호는 아역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덕분에 제가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할 정도로 남자 같았어요. 로맨스 연기는 경험이 많지 않아서 쑥스러워했지만, 히스테릭한 연기는 너무 잘해서 '원래 그런 성격 아니냐'고 감탄할 정도였죠." 과거엔 낯을 많이 가렸지만 이번 작품에선 '누나'답게 마음을 열고 먼저 다다가려고 노력했다. 이 또한 윤은혜가 달라진 점이다.
단편영화 '뜨개질'로 연출에 도전한 것도 연기에 도움이 됐다. '뜨개질'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예민해져요. 오로지 제가 책임지고 평가 받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제 예민함이 때론 주변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영화 시놉시스를 쓰고 스태프와 촬영을 하면서, 그리고 이번 드라마를 찍으면서 그동안 내가 괜한 걸 고집했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죠. 주변을 믿고 따라가도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건 연기의 '디테일'이다. 서민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비싼 시계는 못 찰 것 같다고 한다. 소품 하나까지 맞아떨어져야 연기가 되더란다. "'커피 프린스'에서 남장여자를 연기할 때도 메이크업을 거의 안 하고 머리도 대충 물기만 말려서 정돈했죠. 원래 화장도 제가 직접 하는데, 이번엔 오열신이 너무 많아서 메이크업 스태프가 동행했어요. 힘들어도 전체적인 스타일링까지 제가 챙기려고 노력해요."
윤은혜는 작품을 끝마친 피로감을 느낄 새도 없이 벌써 차기작 욕심을 낸다. 호평 덕분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많은 걸 보여주고 싶고 경험하고 싶다고 한다. "가위도 계속 써야 잘 드는 것처럼, 저를 많이 써야 성숙해질 것 같아요. 그래서 도예도 배우고 그림도 전문적으로 배워보려 해요. 물에 대한 공포가 있는데 연기를 위해서라도 수영은 꼭 도전하려고요. 올해 스물아홉인데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클럽에도 가봤어요. 범죄가 아닌 이상 뭐든지 경험하고 싶어요. 해본 것과 안 해본 것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윤은혜의 어머니가 과거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딸은 딱히 뭐가 예쁘다고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고. 이 말이 윤은혜에겐 배우로서의 장점이 된 듯하다. "예전엔 '청순의 대명사' '귀여움의 대명사' 같은 수식어가 없는 게 서운했어요. 그런데 뭘 어떻게 꾸며놓아도 어울린다는 게 더 좋은 같아요. 남자 역도 어울리잖아요. (웃음) 작품도 그렇게, 지금의 저에게 맞는 역할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