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um App

Experience a richer experience on our mobile app!

'체조신성'성지혜 '오늘을 사는' 열여섯소녀의 희망가

by

'나는 오늘만 산다. 내일만 사는 놈들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영화 '아저씨'의 명대사다. 오늘을 사는 사람은 간절하다. 내일의 헛된 희망보다 지금 발 딛고 선 현재에 대한 믿음 하나로 산다.

'열여섯 체조소녀' 성지혜(대구체고)와 몇마디를 나누다 '아저씨'의 절박한 대사를 떠올렸다.

11~14일 중국 푸톈에서 펼쳐진 제5회 아시아체조선수권에서 한국여자선수로는 최초로 개인종합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종목에서 우월한 기량을 보여줬다. 이단평행봉, 마루, 평균대 3종목에서 결승행에 성공했고, 개인전 이단평행봉 결승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고등학교 1학년, 시니어 첫해에 여자체조의 희망이자 대세로 떠올랐다. 환한 미소를 지을 법도 하건만 내색을 하지 않는다. 무표정이다. 소감을 묻자 "기뻐요" 목표를 묻자 "없어요" 한다. 한문장을 넘어가지 않는 단답형 문답이 이어졌다. 아시아 메달권인 엘리트 선수에게 찾아보기 힘든 반응이었다. 그 또래, 그 클래스의 선수라면 으레 할 말도 사연도 많다. '브라질올림픽,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같은 거창한 목표도 없다고 했다. 그나마 바라는 것이 있다면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명맥이 끊긴 올림픽 단체전 티켓을 따는 것뿐이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잖아요"라고 짧게 덧붙였다. "그냥 매 대회 선생님이 짜주시는 프로그램대로 훈련하고, 매경기 최선을 다할 뿐"이라며 입을 조개처럼 닫았다.

성지혜는 오늘을 사는 선수다. 두살 터울 오빠와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자랐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은 딸에게 '천재적인 유전자'를 유산으로 남겼다. 대구 태전초등학교 2학년 때 체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되며 두각을 나타냈다. 운암중 진학 이후 줄곧 태릉선수촌에서 살다시피 했다. 소년체전 메달을 휩쓸었다. 올해 대구체고에 진학한 후 첫 전국체전에서 여자체조 5관왕에 올랐다. 쟁쟁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제치고, 여자체조 사상 최초로 체전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1등을 밥먹듯이 하는 소녀는 모두가 꿈꾸는 시상대 꼭대기에서도 활짝 웃는 법이 없다. 아시아선수권에서도 그랬다. "기뻐요"라고 답하는 그녀의 눈은 웃지 않았다. 치열하고 고단한 하루를 사는 어린 선수는 매일 자신의 미션을 또박또박 이행할 따름이다.

스스로를 독하게 지켜내야 하는 열여섯 성지혜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때로 자신을 향해 손 내미는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운다. 선수라면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열광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경기결과에 우쭐할 일도, 기죽을 일도 없다. 직설적이다. 정곡을 찌른다. 그녀의 체조 스타일도 '스트레이트'하다. 깔끔하고 대차다. 군더더기가 없다. 10대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냉정하다. 난도 점수는 중국 일본 에이스들에게 밀렸지만, 실수 없는 침착한 연기로 실점을 기어이 만회했다.

체조인들은 입을 모아 '타고난 천재성'을 이야기한다. 보디라인도 유연성도 연기력도 천부적이다. 김은지 여자체조대표팀 코치는 "한국체조에서 성지혜의 난도를 할 줄 아는 선수는 앞으로도 나오겠지만, 실전에서 지혜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연기하는 선수는 나오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첫날 포디움 마루 연습 직후 성지혜는 "음악이 좀 늘어지는 것같다"고 중얼거렸다. 잠시 후 주최측에서 음악이 2초 초과됐다는 연락이 왔다. 성지혜는 단체전 연기를 마친 후 모두가 관심을 갖는 종목별 결선진출자 명단도 보는둥 마는둥했다. 이미 머릿속에 모든 순위가 들어 있는 듯했다. 체조에 필요한 영리한 지능과 예민한 감각을 두루 타고났다. 그래서 체조는 그녀에게 선택이 아닌 운명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체조선수로 살았다. 소녀의 외롭고 힘든 시간을 메워준 것도, 세상에 믿을 것도 오직 체조뿐이다. 하루 7시간 습관처럼 체조연습에 매달린다. "체조는 연습한 대로만 나와요. 그 이상도 이하도 없어요." 그녀는 자신의 메달이 단순히 재능만이 아닌 정직한 땀의 대가임을 안다.

김대원 대한체조협회 전무는 "성지혜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 고3이 된다. 나이나 기량면에서 황금기다. 그런 면에서 이번 아시아선수권 개인종합 2위는 고무적이다. 내년 시즌 시니어가 되는 '기대주' 윤나래(15·대구 운암중)와 함께 여자체조 드림팀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늘을 사는 성지혜는 현재에 충실한 선수다. 오늘을 사는 절박함이 내일의 희망가가 될 수 있기를. 100%의 현재가 모여 100%의 미래를 만든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