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방송된 수목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14회에서, 한재희(박시연)는 안민영(김태훈)변호사를 통해, 뇌손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서은기(문채원)의 관련자료를 확보하고, 이를 이사회에 폭로해 은기를 금치산자로 만들어, 그녀가 태산그룹을 이끌어가기엔 치명적인 상태에 노출되었음을 알리려 했다. 그제서야 온전히 태산그룹이 한재희의 손에 쥐어 쥘 순간, 강마루(송중기)의 회심에 카드 재희오빠 한재식(양익준)이 등장했다.
마루와 함께 나타난 재식은 재희에게, 은기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던 혐의와 마루가 재희를 대신해 뒤집어 쓴 7년 전 모텔 살인사건을 거론하며 그녀를 압박했다. 결국 은기를 금치산자로 만들어 태산그룹에서 내쫓고자했던 재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마루의 지시에 따라, 재희는 은기를 태산그룹 공동대표로 선임하는 안건을 이사회에 제안하며, 착한남자 14회가 끝이 났다.
막판 한재식의 등장은 반전이었고, 한재희를 물먹인 통쾌한 면도 있었다. 그럼에도 착한남자 14회는 바람이 덜 들어간 풍선같았다. 터질 듯 터지지 않는 답답함이나 팽팽한 긴장감이 아니라, 바람자체가 충분히 들어가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뾰족한 바늘 역할을 했던 한재식이 터트린 풍선의 소리가 작을 수밖에 없다. 14회에선 많은 이야기가 진행되었음에도, 왜 그런 느낌이 지배할까.
드라마 착한남자는 '기업'을 소재로 한 성공스토리가 아니라, '사랑'을 다루는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기업을 누가 뺏고 먹느냐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에 앞서, 주인공들의 사랑, 갈등, 발전에서 오는 희열이 더 강하게 임팩트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14회에서는 한재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태산그룹이야기도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인상을 주었고, 러브스토리의 중심인 서은기의 기억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때문에 매회 갈등하고 변화하고 발전해야 할 주인공 '강마루-서은기-한재희'의 모습이 14회에선 정체된 인상을 주었다. 서은기든, 한재희든 누구 한명이라도 역동성을 가지고 먼저 치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다른 주인공들이 따라잡아야 할 목표가 생기면서 함께 역동성을 부여받는데, 주인공 세 명 모두가 주춤하는 모양새였다. 결국 극은 긴장감이 떨어지고 지루한 느낌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착한남자 14회는 다소 실망스럽다.
하지만 그 실망감속에서도, 14회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만든 장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악녀 한재희가 착한남자 강마루에게 했던, '사랑'에 관한 충고였다. 재희는 마루가 은기에게 품은 감정을 양심으로 표현했다. 은기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에게 태산그룹을 찾아주고 원상태로 돌려 놓겠다는 마루의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 양심이라고. 사랑은 의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양심이란 도덕에 휘둘리는 것도 아니라고.
그러면서 사랑이란 마루가 과거에 자신(한재희)에게 주었던 것이며, 그 사랑을 잃고 나서야 피를 토하며 후회하고,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되찾고 싶은 지금의 내 심정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마루는 한재희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으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왜 일까.
사랑에 관한 한재희의 충고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마루가 과거에 재희를 사랑했던 건 사랑이 맞다. 그건 마루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되찾고 싶다던 재희의 바람은 사랑이 아니다. 그건 재희가 마루를 떠나 태산그룹 서회장의 후처가 된 사실을 알고도,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녀를 과거 사랑했던 한재희로 돌려 놓으려했던 마루를 오버랩시킨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는 사실도.
그런데 자신이 태산그룹으로 떠난 한재희를 집착했듯이, 지금 한재희가 마루를 집착하고 있었다. 때문에 재희를 통해 마루는 과거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돌아본다. 마루가 재희를 집착하면서 은기를 불행하게 만들고 자신도 불행해졌듯이, 재희도 마루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마루도, 재희도 불행해질 뿐 아니라, 은기도 불행해질 거란 사실의 깨달음.
하지만 이내 마루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짓는다. 과거의 강마루와 지금의 한재희는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닮았을 진 몰라도, 지금은 강마루는 과거의 마루도 지금의 재희도 아니다. 마루가 은기에게 주는 사랑은 집착을 아니라 희생이기 때문이다. 집착은 소유를 동반한다. 내가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희생은 내가 포기하고 내려놓으면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마루는 악몽을 꾸었다는 은기에게 말했다. 악몽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당신을 기만하고 이용했다면 어쩔 거냐고. 그러자 은기가 대답했다. 용서할 수 없다고. 이에 마루는 웃는다. 마루는 확 안심이 된다면서 은기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말고 꼭 그렇게(용서하지 말라)하라고 말했다.
마루는 용서하려는 감정조차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자신을 배신한 재희를 용서하려는 마루의 마음조차 집착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서은기만은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다. 은기가 마루를 용서하려 애쓸수록, 마루를 집착하게 되고, 그럴수록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 테니까. 마루와 재희처럼, 은기가 집착으로 괴물이 되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재희가 마루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겠다고 했을 때, 마루는 "역겨워!"라고 말했던 것이다. 단지 그 순간에 한재희가 역겨워서 뿐만이 아니라, 재희를 닮아가는 자신이, 혹여나 재희처럼 은기에게 구차하게 용서를 빌며 사랑을 구하고, 집착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마치 미래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고,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자신은 지금의 한재희처럼 절대 구차해지지 않겠다는 다짐같은 것.
마루가 은기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은기와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은기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늘어간다. 말이 쉽지, 강마루가 서은기를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구차하지만 용서를 구해서라도 사랑을 소유하려는 재희를 보면, 앞으로 은기를 대할 마루도 나약해질까 겁이 나는 것이다. 나약해지지 않기 위한 강마루의 몸부림이 '역겨워!'와 같은 독설로 표출된 셈이다. 즉 한재희를 향해서가 아닌, 실질적으론 강마루 자신을 향한 독설.
드라마 '착한남자'는 섬세하지만 불친절한 면도 없지 않다. 인물들이 치는 대사는 대체적으로 돌직구인데, 정작 알고 싶은 속내는 잘 드러나지 않고, 감정표현은 주로 변화구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곱씹어 볼만한 장면들조차 느슨해진 분위기속에 휩쓸릴 정도로, 착한남자 14회의 임팩트가 생각보다 작게 나타난 측면도 있다. 6회를 남긴 시점에서 제작진이 한번쯤 생각해 볼 대목이다. <한우리 객원기자, 대중문화를 말하고 싶을 때(http://manimo.tistory.com/)>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