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타자'의 존재감이란 이런 것일까.
지난 98년 5월28일 샌프란시스코의 배리 본즈는 애리조나전 9회말 2사 만루서 고의4구를 얻은 적이 있다. 상대팀 애리조나의 벅 쇼월터 감독은 8-6의 리드 상황에서 마무리 그렉 올슨에게 고의4구를 지시해 본즈를 거른 뒤 다음 타자를 범타로 잡아내며 1점차 승리를 거뒀다. 위기에서 홈런타자는 피하고 보는게 상책이다. 감독이나 던지는 투수나 실점 위기에서 홈런타자를 만나면 신중한 승부를 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바로 존재감이다.
SK 선발 마리오는 3회말 한꺼번에 6점을 내주며 경기를 그르치고 말았다. 대량실점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홈런타자 이승엽과의 대결을 피한 것이었다. 1사 2,3루서 1번 배영섭에게 중월 2루타를 맞고 2점을 내줬지만 그때까지 마리오의 표정은 상당히 밝아보였다. 특히 2번 정형식을 풀카운트에서 127㎞짜리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낼 때는 포효를 했을 정도로 자신감도 넘쳤다.
그러나 계속된 2사 2루서 3번 이승엽과의 대결이 문제였다. 이승엽은 전날 1차전서 1회 밀어치기로 좌월 투런홈런을 터뜨리며 삼성 승리의 주역이 됐다. 99년 54홈런, 2003년 56홈런의 주인공인 이승엽의 장타력을 마리오가 모를 리 없었다.
마리오는 1회말 1사 1루 이승엽과의 첫 대결에서는 볼카운트 2B2S에서 5구째 몸쪽 높은 136㎞짜리 빠른 슬라이더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냈다. 1회는 굳이 이승엽을 피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3회말은 달랐다. 2점을 내주고 2사 2루서 만난 이승엽은 '다른' 타자일 수 밖에 없었다. 이승엽의 안타 하나면 스코어가 0-3으로 벌어질 수 있고, 혹시 홈런이라도 맞게 되면 마리오로서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철저한 코너워크로 이승엽을 상대했다. 초구 139㎞짜리 직구가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이 됐다. 2구 140㎞ 직구 역시 높은 코스로 들어갔다. 3구째 싱커 역시 볼이 됐고, 4구째 134㎞짜리 슬라이더는 스트라이크를 존을 한참 벗어난 낮은 볼이었다. 고의성 짙은 스트레이트 볼넷이었다. 마리오로서는 2사후 1루가 비어있는 상황에서 전날 결승홈런을 때린 이승엽과 정면승부를 펼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4번타자지만 한국시리즈 들어 타격감이 좋지 않은 박석민과의 대결을 잔뜩 벼르고 있었다. 이승엽을 상대하고 있지만, 마리오의 머릿속에는 다음타자 박석민이 들어섰을 때 볼배합을 어떻게 할지에 관한 고민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뛰어난 선구안을 발휘한 박석민을 볼넷으로 내보낸 뒤 최형우에게 높은 체인지업 실투를 던져 홈런을 맞아 최악의 결과가 나왔지만, 이승엽을 만난 상황에서는 피하는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3회말 마리오에게 이승엽은 결코 평범하게 상대할 타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1차전 좌월 투런홈런을 터뜨린 지 무려 24시간이나 지난 후였지만 '이승엽 효과'는 여전히 강력했다. 대구=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