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신뢰하지 못했던 카드, 하지만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SK가 채병용 덕에 1년 만에 삼성에 복수혈전을 꿈꿀 수 있게 됐다.
플레이오프 최종 5차전, 채병용은 선발 김광현이 1⅔이닝 3실점으로 무너지자 마운드에 올랐다. 비록 경기 초반이긴 하지만, 경기의 흐름은 롯데 쪽으로 가고 있었다. 분위기를 쉽게 타는 롯데에게 에이스 김광현의 강판과 SK 타선을 봉쇄했던 유먼의 존재감은 컸다.
하지만 채병용은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롯데의 희망을 앗아갔다. 최고구속 141㎞. 김광현과 유먼 만큼의 강속구는 없었다. 하지만 탁월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스트라이크존에 걸치는 공을 연달아 던졌다. 한복판으로 몰리는 공은 단 하나도 없었다. 높은 공 역시 타자의 배트를 이끌어내기 위해 던졌다. 치기 좋게 들어온 공이지만, 홈플레이트 앞에서 살아나 범타를 유도해냈다.
▶이만수에게 확신 못 준 채병용, 여유 넘친 첫 등판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2012시즌, 뒤늦게 1군에 합류해 14경기서 3승(3패)을 거두는 데 그치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도 4차전까지 덕아웃과 불펜만 지켰다. 엔트리에 든 26명 중 유일하게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이만수 감독은 "처음 1군에 올라왔을 땐 페이스가 좋았다. 스피드가 떨어져도 타석 앞에선 공이 빠르게 살아 들어갔다. 그런데 시즌 막판에 가니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냉정히 말해 채병용의 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 감독도 아쉬운 마음이 컸다. "2년 반의 공백이 생각보다 큰 것 같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비밀병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라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롯데 타자들이 김광현을 상대로 기록한 6안타가 모두 우측으로 향하자, 채병용을 불렀다. 구속은 느리지만, 몸쪽 공에 강점이 있는 채병용이 해답이 될 것 같았다.
채병용은 마운드에 오르면서 동료 야수들에게 "점수 안 줄테니까 빨리 점수 내!"라고 말했다. SK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이었던 2003년부터 군입대 전 마지막 포스트시즌인 2009년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가을 남자'다운 여유였다. 그리고 SK 타선은 마치 에이스 김광현을 보고 힘을 내듯, 채병용의 어깨를 가볍게 해줬다. 시리즈 내내 꼭꼭 숨어있던 '가을 DNA'가 채병용에 대한 믿음에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정작 채병용은 자신의 피칭에 대해 "100점 만점에 50점 정도"라며 박한 평가를 내렸다. 이어 "내가 믿음을 못 줬기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감독님이 그렇게 보셨다면, 내 공이 좋지 않았던 것"이라며 그동안 마운드에 오르지 못한 과정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채병용 덕분에!' 멀쩡한 SK 선발진, 삼성처럼 '1+1'도 가능?
채병용의 호투가 가져온 효과는 크다. 단순히 5차전 승리,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성과 뿐만이 아니다. 채병용 덕분에 SK는 한국시리즈에서 마운드를 정상 가동할 수 있게 됐다.
사실 5차전에선 윤희상도 불펜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채병용이 쉽게 무너졌다면, 다음 카드는 윤희상이었다. 하지만 SK는 윤희상까지 가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만약 혈투 끝에 대구로 간다 해도 삼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난해에도 SK는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와 5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치렀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부터 매번 5이닝을 책임 못 지던 김광현은 이날도 1이닝 만에 물러났다. 결국 2선발 고든 카드를 꺼내들 수 밖에 없었다. 고든의 3⅔이닝 무실점 호투와 타선 폭발로 한국시리즈 티켓을 따내긴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또다시 새로운 링에 오르는 격이었다.
결국 던질 선발투수가 없던 SK는 1차전서 '땜방 선발' 고효준을 내세워야 했고, 붕괴된 선발진으로 시리즈 내내 무기력한 경기를 펼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막강한 마운드를 자랑하는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컨디션 좋은 선발투수를 두번째 투수로 활용하는 '1+1' 전략으로 SK를 짓밟았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윤희상을 아끼면서 한국시리즈에서 안정적인 선발진을 운용할 수 있게 됐다. 윤희상 송은범 마리오 김광현의 순서를 재정비해 4차전까지 차곡차곡 배치할 수 있다. 플레이오프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마리오는 순서대로라면 3차전 투입이 가능하지만, 2차전으로 앞당겨 삼성을 강하게 압박하는 카드로 쓸 수도 있다.
여기에 플레이오프 엔트리에서 제외된 부시도 한국시리즈에 뛴다. 부시와 채병용을 두번째 투수로 준비해 삼성처럼 '선발급 불펜투수'를 운용할 수 있게 된다.
이만수 감독은 5차전 승리 후 "지금 같은 기분으로 한다면, 한국시리즈에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채병용의 호투가 불러온 효과는 크다. SK가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을 넘어 '대형사고'를 칠 수 있을까.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