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퇴왕' 김호곤 울산 현대 감독은 지난 1일 FA컵 결승 진출 좌절을 아쉬워할 틈이 없었다. 재빠르게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체제로 전환했다. 반복된 일과를 보냈다. 김준현 코치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찍어온 8강 상대 알힐랄의 영상을 보고 또 봤다. 단점을 분석하는데 매진했다. 5일부터 4박5일간 떠난 '약속의 땅' 통영에서도 알힐랄전만 대비했다. 결국 승리의 해법은 찾아냈다. '압박과 빠른 역습'이었다.
김 감독은 상대의 막강 화력을 걱정했다. 물갈이가 된 외국인 공격수들을 경계했다. 가장 위협적인 선수로는 브라질 출신 웨슬리 로페스 다 실바를 꼽았다. 웨슬리는 7월 루마니아 FC바슬루이에서 알힐랄로 둥지를 옮겼다. 브라질 출신답게 개인기가 화려했다. 중동축구의 적응도 필요없었다. 알힐랄 이적 후 5경기에서 무려 7골을 터뜨렸다. 최근 4경기 연속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또 다른 경계 대상은 K-리거 출신 유병수와 야셰르 알 카타니였다.
김 감독이 택한 전략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무엇보다 K-리그 자존심이 걸린 경기였다. 울산은 K-리그 4개 팀들 중 유일하게 챔피언스리그 8강 무대에 올라 있었다. 또 2차전(10월 4일)은 사우디 원정을 떠나야 한다. 안방에서 무조건 많은 점수차로 벌려 놓아야 원정 경기가 수월해지는 것까지 염두에 뒀다. 이제 김 감독이 구상한 그림을 그라운드에서 그리는 것은 선수들의 몫이었다.
19일 울산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이날 울산에는 '극공(극단적인 공격)'과 '철퇴수비'가 녹아 있었다. 우선 김 감독은 베스트11을 공격적으로 구성했다. 최전방에 브라질 출신 외국인선수 하피냐를 두고 마라냥을 섀도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 그동안 고슬기에게 공수조율을 맡긴 것을 비춰봤을 때 극단적으로 공격력에 초점을 맞춘 듯했다. '극공'의 결실은 전반 9분 만에 결실을 맺었다. 페널티박스 왼쪽에서 이근호가 밀어준 패스를 하피냐가 왼발 슛을 날렸다. 이 슈팅이 상대 수비수에 맞고 굴절돼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빠른 역습도 빛을 발했다. 공수전환이 늦은 알힐랄의 허점을 파고 들었다. 상대 패스를 차단한 뒤 간결하고 정확한 패스로 계속해서 파상공세를 펼쳤다.
모든 공격의 원동력이 된 것은 강한 압박이었다. 상대 선수가 공을 잡으면 최소 3명, 최대 4~5명이 둘러싸 공을 빼앗았다. 최전방에서 마라냥과 하피냐의 압박도 수비에 큰 도움이 됐다. 수비형 미드필더 에스티벤의 '팬텀 수비'도 살아났다. 왕성한 활동량으로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휘저으며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는 역할을 해냈다. 상대 선수의 패스 타이밍이 늦으면 어느 순간 나타나 볼을 빼앗아 역습의 시발점 역할도 했다.
11명이 모두 하나가 된 '철퇴수비'도 돋보였다. 수비 시 7~8명의 질식수비로 상대 공격수가 돌파할 틈을 주지 않았다. 결국 경계 대상으로 꼽혔던 유병수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 후반 32분 알 카타니와 교체됐다.
울산은 K-리그의 자존심을 제대로 지켰다. 하피냐의 결승골을 잘 지켜 1대0 신승을 거뒀다. 원정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날 승리는 '철퇴왕'의 완벽한 분석과 선수들의 투혼이 만들어낸 한국축구의 자존심이었다.
울산=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