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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때문에 신혼여행도 못간 이정민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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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가족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순간,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야구팬들의 눈시울도 모두 붉어졌을 것이다. 롯데 투수 이정민(33)이 29일 인천 SK전에서 거둔 3254일 만의 승리는 그만큼 감동적이었다. 하루가 지난 30일, 이정민과 전화통화를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난밤의 떨림이 그대로 간직돼 있었다.

▶하루 만원 용돈 타쓰는 남편의 '불꽃 투구'

이정민은 29일 경기 후 "아내와의 내기가 자극이 됐다"는 재밌는 소감을 밝혔다. 이닝을 소화할 때마다 5만원을 이정민이 받는 조건의 내기였다. 대신 실점할 때마다 3만원이 깎였다. 결국 이정민은 이날 경기 승리로 37만원의 수확을 올렸다. 이정민은 "평소 아내에게 하루 만원 용돈을 타쓴다"고 했다. 이런 이정민에게 이날 경기는 천금의(?)기회였다. 물론, 용돈 때문은 아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던졌다. 이정민은 "경기 후 아내가 나에게 '5이닝 막았으면 됐지, 뭘 그렇게 오래 던졌냐'는 타박을 했다"며 밝게 웃었다.

이정민은 지난 2010년 시즌을 마친 후 한 살 아래 김선영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상무에서 군 복무를 할 당시 만나 3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이정민이 1군 경기에 등판하지 못하며 내리막길을 걷던 시점. 이정민은 "당시 아내가 정말 큰 힘이 돼줬다"며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지금도 가장 든든한 지원군. 내기를 먼저 제안한 것도 아내 김씨였다. 올시즌 첫 선발등판 경기였던 지난 18일 넥센전에서 이정민은 승리요건을 갖출 수 있있다. 하지만 5회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런 이정민을 위해 김씨가 사기진작 차원에서 '깜짝 내기'를 제안한 것이다.

이정민은 항상 아내에게 미안하다. 남들 다 가는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정민은 2010년 결혼 후 곧바로 호주교육리그에 참가했다. 야구가 먼저였다. 대신 2010 시즌을 마치고 꼭 신혼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내 김씨가 임신을 했다. 이정민은 "아기가 너무 어려 올시즌 후에도 미뤄진 신혼여행을 가지는 못할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승엽이 형이 공 좋다고 칭찬해주던데요."

이정민에게 '이승엽'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세 글자다. 이정민은 지난 2003년 10월2일 이승엽이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인 56번째 홈런을 칠 때 마운드에 서있었다. 뭘 해도 '이승엽에게 신기록을 허용한 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이승엽은 '아시아 홈런왕' 타이틀을 따낸 후 일본무대에 진출했다. 첫 팀은 지바롯데. 공교롭게도 이정민의 소속구단인 롯데는 매시즌 지바롯데 캠프에 일부 선수들을 파견했다. 이승엽 진출 첫 해 롯데 파견자 명단에 이정민의 이름이 있었다. 이정민은 "매우 즐겁게 함께 훈련했었다. 신기록을 내줘 어색하다거나 그런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고 설명. 이어 "당시 한국에 돌아갈 때 승엽이형이 '필요한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는데 그 이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며 웃었다. 그랬던 두 사람이 지난주 대구에서 만났다. 이정민은 "덕아웃에 나와있는데 1루에 있던 승엽이 형이 '요즘 공 좋더라'고 격려해줬다"는 뒷얘기도 공개했다.

이정민에게 이승엽은 애증의 대상이 절대 아니다. 이정민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위에서는 매우 큰 일로 보시는 것 같다"며 "그냥 내 야구 인생에 1경기였을 뿐이다. 오히려 당시 많은 관중 앞에서 긴장감 넘치는 경기를 했던게 야구를 하는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지금도 큰 경기에서 유독 떨지 않고 던진다"고 했다.

▶진짜 가슴 아팠던 것은 '새가슴' 비아냥

이정민은 2002년 롯데의 1차지명을 받으며 큰 기대속에 입단했다. 빠르고 묵직한 직구를 갖고 있는 최고의 유망주였다.

하지만 그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2003년 10월2일 삼성전이었다. 비극 속의 희극이었다. 공교롭게도 이승엽에게 역사적인 홈런을 허용한 날 승리투수라는 타이틀을 거머줬다. 한 야구 해설가는 "아마 그 때 이정민이 홈런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더 큰 투수로 성장하지 않았을까"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이정민은 "그저 내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렇게 9년의 시간이 흘렀다. 2000년대 중반 중간계투로 괜찮은 활약을 보이기도 했지만 기대치 만큼은 아니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이정민은 '새가슴' 투수로 통했다. 좋은 구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마운드에만 서면 제구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정민은 "'새가슴'이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정말 힘들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나도 정말 잘하고 싶었다. 누구한테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정민이 올시즌 확 달라졌다. 선발로 등판한 2경기에서 완벽한 제구력을 선보였다. 150㎞에 육박하는 구속도 그대로였다. 이 '돌직구'가 몸쪽에 과감히 꽂히니 타자들이 제대로 공략하기 힘들었다. 이정민은 "달라진게 있다면 힘을 빼고 던지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라며 "팔에 힘을 빼고 던지면 마운드에서 볼 때는 공이 느리게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TV로 다시 보니 공 끝에 힘이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절실함도 이정민을 달라지게 한 원동력이다. 이정민은 올시즌을 앞두고 열린 스프링캠프에 제외됐다. 충격이었다. 하지만 1월 예쁜 딸이 태어났다. 이정민은 "아내와 딸을 위해서라도 죽을 힘을 다해 훈련했다"고 밝혔다.

김 용 기자 aweso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