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수 네 명이 달라 붙었다. 팽팽한 공방전 속에 나온 최고의 찬스였다. 반대편 포스트를 힐끗 바라본 뒤 오른발을 갖다댔다. 빗맞았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골대 구석으로 굴러 들어갔다. 두 팔을 뻗고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그의 얼굴에는 지난 날의 마음 고생을 훌쩍 털어내는 포효가 함께 했다. 한국 축구는 사상 첫 동메달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은 박주영(27·아스널)에게 '힐링캠프'였다. 지난 3월부터 5개월 동안 마음을 옥죄고 있었던 '병역 논란'에서 자유로워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으로 결자해지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둘 만하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응어리가 져 있었다.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병역 연기'는 돌팔매로 돌아왔다. 무수한 비난과 질타가 쏟아졌다. A대표팀 발탁 문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일정에 합류하지 못했다. 국내 체류 일정에 제한이 생기면서 팀 훈련 대신 해외 훈련을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오로지 축구만을 생각했다. 자신의 병풍을 자처하면서 든든한 원군이 되어줬던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과 동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했다. "그 선수들과 함께 아주 좋은, 즐겁고 행복한 축구를 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축구를 가장 하고 싶었다." 런던올림픽에 나선 박주영은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주장 구자철(23·아우크스부르크)이 겉으로 드러나는 리더였다면, 박주영은 정신적 리더 역할을 수행하는 '숨은 리더'였다. 훈련장에서 누구보다 의욕을 드러냈고, 그라운드에서도 분주히 움직이면서 수비진을 흔들었다.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0-3으로 끌려가고 있던 후반 중반, 교체투입된 박주영의 입에서 나온 "포기하지마"라는 말은 심금을 울렸다.
마지막 순간 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 일본전 승리로 홍명보호는 한국 축구 사상 첫 동메달 쾌거라는 역사를 썼고, 후배들은 메달 획득으로 '병역 면제'라는 선물을 받았다. 박주영 스스로 기나긴 '병역'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일본전 득점 뒤 선수들 얼굴 하나하나가 생각났다. 그 선수들에게 좋은 길과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줘 한국 축구가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메달을 목에 건 박주영은 이제 한국 체류 날짜를 셀 필요가 없어졌다. 남들처럼 마음 편히 고향땅에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꿈도 이뤄졌다. 앞으로 한국 축구는 유럽 무대에서 성장해가는 박주영과 함께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됐다.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