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봉 연기 도중 슈즈가 벗겨졌다. 예기치 않은 돌발상황이었다. 맨발의 손연재는 꿋꿋하게 자신의 연기를 이어갔다.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다행히 의상 벌점은 없었지만 시간이 초과되며 0.05점의 페널티를 받았다. 26.350점, 위기였다.
전날 후프-볼 연기에서 전체 24명 중 당당히 4위에 올랐다. 상위 10위까지 진출하는 결선행이 무난할 것으로 예상된 상황에서 곤봉에서 불의의 악재를 만났다. 마지막 리본 종목에 지난 2년간 피땀 흘려 준비해온 모든 것을 걸었다. 레드-화이트 레오터드를 입은 손연재는 언제나처럼 어깨를 흔들며 씩씩한 포즈로 등장했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이다. 한국 전통부채를 소재로 한 리본은 올시즌 손연재가 가장 강력했던 종목이다. 5번의 월드컵시리즈에서 3차례 28점대를 기록했고, 지난 5월 국제체조연맹(FIG) 유일한 A급대회로 세계 톱랭커들이 총출동한 소피아월드컵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기분좋은 루틴이다. 28.050점, 위기를 보란듯이 극복했다.
손연재는 10일 밤(한국시각) 런던 웸블리아레나에서 펼쳐진 런던올림픽 리듬체조에서 개인종합 예선 6위로 한국 리듬체조 사상 첫 결선 진출을 이뤘다. 후프 (28.075점, 3위) 볼(27.825점, 6위) 곤봉(26.350점) 리본(28.050점) 4종목에서 총점 110.300점을 기록했다. 런던올림픽, 대한민국 최초의 결선행 꿈이 이뤄졌다.
올시즌 5차례 월드컵시리즈에서 2번의 전종목 결선진출과 2개의 동메달을 따내며 '28점대 에이스'로 인정받았던 손연재는 올림픽 무대에서도 '폭풍 성장세'를 유감없이 입증했다. 곤봉에서의 실수를 리본에서 완벽하게 만회하며 흔들림 없는 위기 관리 능력도 보여줬다. 지난해 몽펠리에세계선수권 11위 손연재가 6위로 약진했다.
만족스러운 연기를 마치고 돌아온 손연재가 생긋 미소 짓자 러시아 코치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손연재를 끌어안았다. 지난해부터 손연재의 지도를 전담해온 옐레나 니표도바 코치다. 베이징올림픽 당시 신수지(21·세종대)에 이어 손연재를 가르쳐온 지한파 러시아 코치다. 손연재가 외로운 전지훈련에서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다.
러시아 현지에서 손연재의 훈련을 지켜본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니표도바 코치의 열정과 집요함을 이야기한다. 한동작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연재를 들여보내지 않는다. 밤 9~10시가 넘어가도록 마음에 들 때까지 같은 동작을 무한 반복 시킨다. 갓 태어난 아기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제자' 손연재의 올림픽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식이요법에 있어서도 엄격하다. 올림픽을 앞두고 니표도바 코치는 "절대 살이 쪄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리듬체조에서 비주얼은 중요하다. 1m70대의 '쭉쭉빵빵' 미녀들이 즐비한 리듬체조계에서 1m66의 손연재는 더 갸냘프고 깜찍한 이미지로 어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살이 찌면 점프를 가볍게 뛰기 어렵고 부상 위험도 상존한다. 매 식사때마다 손연재가 무엇을 먹는지 꼼꼼하게 검사한다. 샐러드, 요구르트, 시리얼 밖에 없는 삭막한 식탁에서 속이 상해 돌아선 적이 있을 정도로 혹독한 관리를 받았지만, 그래도 손연재는 니표도바 코치의 진심을 안다..
포디움 밖에서의 니표도바 코치는 엄마처럼 따뜻하다. 월드컵 시리즈 대회가 끝난 후면 발레, 뮤지컬 등 공연을 보여주며 지친 손연재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한다. 손연재의 러시아어 실력은 니표도바 코치와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을 만큼 늘었다.
지난해 니표도바 코치는 임신과 출산으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올시즌 니표도바 코치가 돌아온 이후 손연재의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각종 월드컵에서 28점대 에이스로 우뚝 섰다. 박태환이 마이클 볼 전담코치 아래에서 실력과 정신 모두 성장했듯 손연재 역시 니표도바 코치의 애정어린 지도 속에 몸도 마음도 성장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니표도바 코치를 향한 무한신뢰를 드러낸다.
니표도바 코치는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지도자로 등록됐다. 대한체육회와 대한체조협회가 옐레나 코치에게 한국 코치 AD카드를 발급했다. 예선 둘째날 김지희 한국대표팀 코치와 나란히 앉아 대한민국 리듬체조의 사상 첫 결선 진출을 자축했다. 지난 2년간, 하루 8시간 지독했던 지옥훈련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손연재는 11~12일 결선에서 세계 최고의 리듬체조 스타들과 진검승부한다. 사상 최고의 랭킹에 도전한다. 런던=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