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고 링에 올랐다"는 한순철(28·서울시청)은 승리를 확신했다. 심판이 그의 손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다. 같은 시각 대학생 아내 임연아씨(22)는 두 살 딸(도이), 친정 식구들과 경남 김해 친정집 TV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아빠 복서' 한순철은 사실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간 런던올림픽에서 4강에 진출했다. 동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모두가 금메달 후보이자 세계랭킹 1위 신종훈(라이트플라이급)을 주목했다. 세계랭킹 19위 한순철은 관심 밖에 있었다. 그는 비인기 종목 선수인데다 신종훈의 그늘에 많이 가려져 있었다.
한순철은 7일(이하 한국시각) 영국 런던 엑셀 런던 사우스아레나에서 벌어진 남자 복싱 라이트급(60㎏) 8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의 가이브나자로프를 16대13으로 앞서 판정승했다. 경기를 노련하게 잘 풀어갔다. 그는 2010년 러시아 포펜첸코 국제복싱대회에서 가이브나자로프를 꺾었던 적이 있다. 한순철은 상대적으로 큰 키와 팔을 이용해 상대의 빈틈을 치고 빠지며 포인트를 잘 쌓았다.
4강전은 11일 오전 5시15분 벌어진다. 4강전 상대는 리투아니아의 페트라우스카스다. 복싱은 3~4위전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4강전에서 승리할 경우 최소 은메달을 확보하게 된다. 지더라도 동메달을 받게 된다.
아내 임씨는 승리한 후 휴대폰을 잡고 카카오톡으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무 잘 했어. 다들 난리났어. 엄마와 나는 바로 울어버렸어. 여보 최고.'
한순철은 8강전 하루 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내는 수시로 격려 문자를 보냈지만 남편은 열어보지 않았다. 온 정신을 한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서 였다. 이틀 전 마지막 통화에서 한순철은 아내에게 "오빠 컨디션 좋다. 열심히 할게"라고 했다.
그는 이번 8강전 결과에 따라 인생이 달라졌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주어지는 병역특례에따라 군면제 혜택을 받게 됐다. 이번에 이기지 못했다면 한순철은 올해 안에 군대에 가야 했다. 그럼 대학생 아내와 갓난아기의 생계를 책임질 방법이 없었다.
임씨는 "지금은 오빠의 연봉으로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군대에 가게 되면 지금 당장 제가 학업을 중단하고 일을 해서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한순철에게 가족은 큰 동기부여가 됐다. 그는 2009년 복싱하는 후배의 소개로 당시 고교 졸업반이었던 임씨를 만났다. 임씨가 먼저 한순철을 소개시켜달라고 했고, 둘은 만나자 마자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2010년 임신했다. 한순철은 술먹고 용기를 내 장인집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임씨를 책임지겠다고 해 처음엔 복서 사위를 반대했던 장인과 장모로부터 결혼을 허락 받았다. 둘은 올해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한순철은 4강 진출 후 "오늘 링에서 죽을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3라운드 후반에 승리를 직감했다"면서 "어머니에게 먼저 죄송하다. 가정을 꾸리고 나서 신경을 잘 못 썼다"고 했다.
한순철의 어머니 이상녀씨는 혼자 속초에서 식당을 꾸려서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설악중 3학년때 아버지가 세상을 먼저 떠난 후 힘들게 살았다. 이씨도 아들의 4강 진출을 TV로 본 후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한다"고 했다.
한순철에게 이번 올림픽은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마지막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는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밴텀급(54㎏)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라이트급 동메달을 땄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선 밴텀급에 출전했다가 체중 감량에 실패 1회전에서 탈락했다. 고된 훈련과 손이 안 좋은 상황이라 대표선수를 오래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임씨는 "최근에 아파트가 불타는 꿈을 꿨다. 또 며칠전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든(고깃집)에 비도 안 오는데 큰 두꺼비가 나타났다"고 했다. 어린 아내는 한순철이 귀국하면 가장 좋아하는 한방 오리백숙을 해먹이고 싶다고 했다. 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