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응이형, 조금만 버텨 주세요."
여전히 전광판의 KIA쪽 스코어는 '0'에서 변함이 없었다. 뜨거운 기온 속에서 슬슬 '힘이 든다'는 생각이 나고 있었다. 4일 잠실 두산전에 선발로 나선 KIA 서재응은 5회가 넘어가지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하필 6회에는 유격수 김선빈의 실책으로 출루한 두산 오재원이 4번 윤석민의 우전적시타 때 홈을 밟아 2점째를 뽑았다. 스코어는 0-2, 그리 많은 차이는 아니지만 KIA 타선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멀어보이는 차이였다.
그때쯤이다. 포수 차일목이 이닝을 마치고 내려오던 투수 서재응에게 말을 했다. "재응이형, 저희가 경기 전에 한 얘기 기억하시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시작합니다". 서재응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일목이 한 이야기는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리고 서재응은 왜 그 말에 미소를 지었을까.
KIA 야수들은 서재응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쉽게 말해 무언가 빚을 진 듯한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서재응이 마운드에서 호투를 할 때 타선이 침묵하는 바람에 승리를 안겨주지 못한 적이 많았다. 이날 경기 전까지 서재응은 무려 10차례의 퀄리티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지만, 이 중에서 승리로 연결된 것은 단 3번 뿐. 오히려 퀄리티스타트를 하고도 패전투수가 된 것이 5차례로 더 많았다.
일반적으로 선발투수가 최소 6이닝 동안 마운드를 지키며 3점 이하를 내주는 퀄리티스타트를 했다고 하면 승리투수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대 투수가 에이스급이거나 그날따라 제구력이 뛰어나 타선이 3점도 못 뽑아준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 선발이 경기 중반까지 3점 이하를 내줄 경우 타선의 집중력도 살아난다.
그러나 올해 KIA 타선은 서재응이 나설 때 그러지 못했다. 서재응 뿐만이 아니라 에이스 윤석민이 등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반적으로 올해 KIA 타선의 득점력 저하는 심각한 편이다. 선발진은 때때로 야속할 때가 있지만, 내색할 수는 없다. 타자들이 치고 싶지 않아서 안 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어서다.
이러한 문제는 타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 특히 팀의 베테랑 투수인 서재응이나 에이스 윤석민이 경기 후반까지 호투하며 투혼을 보여줄 때 점수를 뽑아주지 못하는 경우 '미안함'의 무게는 더욱 커진다. 3일 잠실 두산전에서의 패배도 모양새는 경기 후반 불펜진의 난조였지만, 만약 KIA 타선이 1~2점 정도를 더 뽑아줬다면 역전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KIA 타자들은 4일 경기를 앞두고 따로 결의를 다졌다. 주장인 포수 차일목의 주도로 이뤄진 이 결의의 주제는 '서재응 구하기'였다.
차일목은 "서재응 선배가 올해 정말 잘 던지고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너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야수들끼리 오늘만큼은 조금 더 집중해보자고 결의를 다졌다"고 밝혔다. 이런 결의는 경기 시작전부터 서재응에게 전달됐다. "선배님, 오늘은 우리가 꼭 점수 많이 낼게요. 힘내십쇼". 이 말을 들은 서재응은 한층 집중력을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실제로 성공했다. 6회까지 무득점에 그쳤던 KIA 타자들이 7회에 대거 6점을 뽑아 역전을 이뤄내며 서재응에게 승리투수 요건을 안겨준 것이다.
서재응은 "경기 전부터 야수들이 뭔가 준비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기 중에도 수시로 후배들이 기운내라는 격려를 해주더라. 이런 말을 들을 때는 정말 큰 힘이 된다"면서 동료들의 깜짝 프로젝트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서재응이 39일만에 시즌 5승째를 달성할 수 있던 배경에는 이같은 동료들의 깜짝 지원 프로젝트가 숨어있었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