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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기보배와 로만 '마지막 화살' 5mm 차이가 말해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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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유상철(현 대전시티즌 감독)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과 스페인의 4강전 당시 홍명보(현 올림픽대표팀 감독)의 마지막 승부차기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 여자 양궁 개인전 결승전에 출전한 한국 여자양궁대표팀의 '에이스' 기보배(24·광주광역시청)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기보배는 2일(한국시간) 런던의 로즈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벌어진 2012런던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아이다 로만(24·멕시코)와 5세트까지 세트스코어 5-5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어진 연장 슛오프.

먼저 시위를 당긴 기보배의 화살이 8점에 꽂혔다. 단 한 발의 화살로 승부를 가리는 슛오프 승부에서, 그것도 세계에서 활을 가장 잘 쏜다는 선수들끼리 맞붙은 슛오프 맞대결에서 8점을 쐈다는 것은 사실상 패배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기보배는 애써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고 있었고, 이어진 로만의 슈팅 순서.

로만이 활 시위를 당겼을 때 화면에 표시된 바람의 세기는 초속 3-4m 정도로 비교적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로만은 잠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듯하더니 바람이 초속 1m대로 잦아들자 화살을 과녁으로 날려보냈다. 기보배와 같은 8점의 영역에 꽂혔다.

하지만 슛오프 승부의 경우 과녁 정중앙에 가깝게 쏜 쪽을 승자가 되는데 기보배의 화살이 육안으로 봐도 로만의 화살보다는 과녁 정중앙 쪽에 가깝게 꽂혀 있었다. 기보배의 승리였다. 승리의 여신이 도와주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승리였다.

기보배는 경기 직후 기자회견에서 로만의 마지막 화살을 차마 보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로만의 화살이 활을 떠나는 소리를 들었고, 이후 전광판을 통해 로만의 화살이 꽂힌 장면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승리를 알았다는 것.

측정결과 기보배의 화살은 로만의 화살보다 과녁 정중앙 쪽으로 불과 5mm 정도 더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몇 회에 걸쳐 치러진 올림픽 양궁 개인전 결승에서 이처럼 극적인 승부가 연출된 사례는 없었다.

기보배는 기쁨과 안도감에 눈물을, 로만은 아쉬움에 눈물을 훔쳤다.

이날 기보배와 로만의 결승전 슛오프 마지막 화살에서 나타난 5mm의 차이는 한국 양궁과 '타도한국'을 외치고 있는 다른 경쟁국들의 미세하지만 결코 좁혀지기 쉽지 않은 격차 내지 클래스의 차이를 나타내 주는 단적인 장면이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 결정적인 실수로 패배의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승리의 여신이 나서서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한국의 양궁 선수들은 혹독한 훈련과 자신을 버리는 헌신을 통해 올림픽 무대에 나선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서도 과녁 중앙에 화살을 꽂아 넣을 수 있는 테크닉 뿐만 아니라 장기간의 레이스를 치르는데 따른 체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멘탈 매니지먼트까지…

한국의 양궁 선수들은 이미 30여년전부터 꾸준히 양궁 경기에서 벌어질 수 있는 수천 수만 가지 상황을 대비해오고 있다.

물론 현재는 한국인 지도자들이 세계 각국의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활약하면서 이런저런 노하우들이 전파됐지만 한국 양궁이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끈기있고, 강인한 승부근성을 가진 선수들의 기질과 체계적이면서도 치밀한 훈련이 결합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분은 결코 외국의 선수들이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부분이다.

기보배와 로만의 슛오프에서 나타난 5mm의 차이는 물리적으로 매우 미세한 차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의미는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다. <임재훈 객원기자, 스포토픽(http://www.sportopi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