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올림픽 배드민턴에서 발생한 '져주기 파문'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고 있다. '져주기'로 징계를 받은 한국 선수단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되는 등 또다른 논란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한체육회(KOC)는 실격처리된 정경은(KGC 인삼공사)-김하나(삼성전기), 하정은(대교눈높이)-김민정(전북은행) 등 선수 4명과 김문수 코치에게 귀국 조치를 내렸다. 이기흥 한국 선수단장은 2일(한국시각) 메인프레스센터(MPC)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늘 아침 임원 회의를 열어 실격된 선수 4명과 김문수 코치 등 5명의 AD카드를 회수하고, 선수촌에서 퇴촌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선수들은 경위서를 통해 '이유를 막론하고 이런 일이 벌어져 죄송하다'는 뜻을 KOC에 전했다.
'져주기' 경기를 펼친 행위 자체는 올림픽 정신 뿐만 아니라 세계배드민턴연맹(BWF) 규정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가담 정도에 따라 억울한 측면도 있겠지만 올림픽인 만큼 전원 실격 징계를 받아도 사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성적지상주의'에 편승해 이런 불미스런 사태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아니면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게 만든 현실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도 높다.
세계 배드민턴을 지휘하는 BWF가 도마에 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이번같은 사태가 나올 것이란 예상이 진작부터 가능했는데도 BWF가 사전 예방대책에 미흡한 면이 많았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BWF는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조별예선제라는 새로운 경기방식을 도입했다. 조별예선제가 문제는 아니다. BWF가 경기일정을 짜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조별예선 이후 단판승부 토너먼트의 대진을 미리 공개해 8강(단식의 경우 16강)에 오르면 어떤 상대와 만날지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조별예선 통과가 확정된 상태라면 까다로운 상대를 피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기 좋은 구조였다. 축구 등 다른 종목도 비슷한 방식이다. 하지만 BWF는 경기일정을 잘못 배치했다. 축구처럼 조별 최종전을 같은 시간 동시에 진행하면 조별순위 조작이 불가능하다. 반면 배드민턴은 이번에 문제가 된 2경기의 경우 1시20분 간격으로 벌어졌다. 조별예선 경기순서 편성도 미흡했다. 여자복식 조별예선에서는 팀당 3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각 조별 최강 2개팀이 최종전에서 맞붙도록 편성됐다. 최종전 이전에 2연승으로 8강을 확정한 상태였으니 최종전 조작이 가능해진 것. 초반에 강팀끼리 붙여 한 번 승패를 가렸다면 최종전을 대충 할 수 없게 된다. 8강 대진표 작성에서도 예방책은 있었다. 조별예선이 끝난 뒤 새로운 추첨을 통해 토너먼트 대진을 다시 짜면 된다는 게 배드민턴협회의 제안이다.
▶조별예선제 왜 도입했나
배드민턴에서 조별예선제는 런던올림픽이 처음이다. 각종 오픈대회, 슈퍼시리즈에서도 토너먼트로 대회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종전 5차례 올림픽도 모두 토너먼트 방식(단식 64강, 복식 16강부터)으로 실시됐고, '져주기' 등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BWF가 올해 조별예선제를 도입한 취지는 좋았다. 세계 배드민턴계의 전력 평준화와 참여의 폭 확대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 조별예선제가 도입되면서 남자단식 40명, 여자단식 46명이 각각 16개조로 나뉘었고 복식은 각각 16개팀이 4개조로 나뉘어 경기를 치렀다. 전체 출전선수 숫자는 종전보다 줄었지만 예선리그로 인해 선수 개인당 경기수가 많아졌다. 종전처럼 약체 선수의 경우 달랑 1경기를 치른 뒤 짐을 싸야하는 경우는 없다. 그동안 올림픽은 배드민턴 약소국에게는 들러리 무대나 다름없었다. 변방 국가들의 참여를 유발하고 올림픽이란 큰 무대에서 한 경기라도 더 치르면서 경험을 쌓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조별예선이 적합했다. 화합으로 함께 즐기는 올림픽의 취지와도 맞았다. 하지만 기술적인 실행과정에서 오류가 났다.
▶초강경 전원실격 징계 왜?
'져주기 파문'으로 인한 무더기 실격사태는 세계 배드민턴계 사상 초유의 일이다. BWF가 예상밖의 초강경 징계 카드를 빼든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오만한 중국을 겨냥한 경종과 올림픽 정식종목을 위한 정치적 계산이다. 2010년까지 10년간 한국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중수 전 감독은 "BWF가 이번 기회에 중국을 겨냥해 제대로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국제 배드민턴계에서는 중국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매년 각종 국제대회를 치르다보면 중국이 같은 중국팀과 만났을 때 일부러 기권하거나 몰아주는 등의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게 김 전 감독의 목격담이다. 2000년대 들어 배드민턴 최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대진까지 조절하며 실적을 챙겨왔으니 다른 회원국들의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국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기 전 배드민턴 강호였던 유럽국가들의 견제심리는 더욱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오픈대회에서 저질러왔던 횡포를 올림픽에서까지 감행하자 "잘 걸렸다. 이참에 강력하게 경종을 울리자"는 의견이 대세가 됐을 것이라는 게 김 전 감독의 설명이다. 올림픽 정식종목 유지를 염두에 둔 포석도 작용했다. 배드민턴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배드민턴이 비신사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퇴출종목에 오를 우려가 크다. 특히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최근 승부조작 근절에 역점을 두고 있다. 올림픽 정식종목으로서 성공적인 정착을 바라보고 있는 마당에 IOC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은 BWF로서는 강력한 자정의지를 과시함으로써 실추된 이미지에서 신속히 탈출할 필요가 있었다.최만식 기자 cm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