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아픔이었다.
결코 기량에선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했지만 '우물안 개구리'였다. 한계에 부딪힌 그는 좌절했다. "축구를 잘 하는 어린 선수들이 정말 많더라." 솔직한 느낌이었다. 자만심에 찬 그를 내려놓았다.
4년이 흘렀다. 패배주의는 사라졌다. 또래와의 두 번째 올림픽, 더 이상 출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목표가 뚜렷하게 섰다.
운명의 날이 밝았다. 한국 축구가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이후 8년 만에 8강 진출에 도전한다. 홍명보호는 2일 오전 1시(이하 한국시각) 런던 웸블리스타디움에서 가봉과 B조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른다.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오른다. 고지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조 1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Ki(키)'가 'Key(키·열쇠)'를 쥐고 있다. 기성용(23·셀틱)이 런던에서 세계적인 빛으로 조명받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가봉전을 앞둔 한국 축구를 분석했다. 파란을 일으킬 팀으로 부상했다고 소개했다. 그 중심에 기성용이 서있다고 했다. FIFA는 '기성용은 한국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다. 평정심을 유지하면서도 정확한 패스와 태클 능력을 갖춘 전천후 플레이어'라며 '진정한 팀의 리더다운 자신감이 배있다. 경기장 안팎에서 개인보다 팀을 더 우선에 두는 선수'라고 극찬했다.
한때 그는 공격 성향이 강한 반쪽자리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평가를 받았다. 벽에 가로막혔다. 2010년 1월 스코틀랜드에서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한 그는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FC서울 시절 스승인 세뇰 귀네슈 터키 트라브존스포르 감독이 영입 제의를 했다. 그도 흔들렸고, 미래도 우울했다. 축구화 끈을 고쳐맸다. 거칠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무대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축구에 새로운 눈을 떴다.
기성용이 한국 축구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FIFA의 설명대로 그는 월드 클래스 중원사령관으로 성장했다. 멕시코(0대0 무), 스위스(2대1 승)와의 1, 2차전에서 중원을 지배했다. 상대를 압도했다. 그의 임무는 공수조율이다. 공격시에는 송곳같은 패스로 좌우, 중앙으로 볼을 뿌린다. 방향전환을 위한 롱패스에도 오차가 없다. 세트피스를 전담하며 현란한 킥력도 자랑한다. 간간이 뿜어내는 중거리 슈팅도 상대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수세시에는 거친 수비로 상대의 맥을 끊는다. 1인 3~4역을 거뜬히 소화했다.
조별리그가 종착역이다. 가봉을 넘어야 사상 첫 올림픽 메달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가봉은 눈을 돌릴 것이 없다. 2골차 이상으로 한국을 꺾어야 8강 진출에 희망이 있다. 경기 초반부터 파상공세를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기성용의 역할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한국 축구의 운명이 그의 발끝에 걸렸다. 가봉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부화뇌동할 필요가 없다. 공수에 걸쳐 중심을 잡아야 한다. 침착하고 영리한 경기 운영으로 팀을 이끌어야 한다. 그가 무너지면 홍명보호도 무너질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굴러온 돌이다. 유럽파라 런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함께 하지 못했다. 홍명보호에 어떻게 적응할지에 물음표가 달렸다.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기성용의 성격은 적극적이다. 그라운드에서 입이 쉴새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활발하게 혀를 움직인다. 동료들도 그의 말이라면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반나절에 런던에 도착할 수 있다. 64년 전인 1948년 런던올림픽, 꿈을 향해 내달린 시간은 20박21일이었다. 서울역에서 출발, 부산에 도착한 뒤 배에 올랐다. 일본 후쿠오카, 요코하마를 거쳐 홍콩, 방콕(태국), 카라치(파키스탄), 카이로(이집트), 암스테르담(네덜란드)을 경유한 뒤에야 프로펠러 엔진을 단 비행기에 올랐다. 약 70명으로 이뤄진 한국 선수단에 축구대표팀도 있었다. 한국 축구의 첫 올림픽 도전이었고, 8강 진출에 성공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은 기성용의 시대다. 기성용이 새 역사를 쓸 채비를 마쳤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