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는 꿈을 꿨는데 아주 생생했다. 반면 금메달을 따는 꿈은 한 번도 꾸지 못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훈련을 하다 발목이 돌아갔다. 테이핑을 하고 숙소에 돌아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오늘 또 느꼈다. 부상을 조심해야 겠다."
4년 전 베이징올림픽에서 갈비뼈 부상에도 투혼을 발휘했지만 결승에서 13초만에 무릎을 꿇은 그다. 시상대에 선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4년 뒤를 기약했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9년 술집에서 여성을 폭행하며 물의를 일으켰다. 한때 유도복을 벗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다시 돌아온 매트. 그동안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어느덧 '젊은 피'에서 한국 유도를 이끌 대들보로 성장한 남자 유도 73kg급의 간판 왕기춘(24·포항시청).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그와 런던의 꿈을 함께 그려봤다.
▶내가 만든 징크스는 내 손으로
73kg급은 한국 남자 유도의 간판이다. 이원희 여자대표팀 코치에 이어 왕기춘이 73kg급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계보 속에는 왕기춘에게 아픔이 될만한 '불편한 진실'이 숨어져 있다. "'디펜딩 챔피언'을 원희형이 다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다 깼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이원희는 남자 유도 73kg급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년 뒤 베이징올림픽과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왕기춘은 선배의 금메달 타이틀을 지켜주지 못했다. 모두 은메달에 머물렀다. 세계선수권이나 지역 대회에서는 매번 우승을 차지하면서도 종합대회에만 출전하면 금메달과 인연이 없는 '종합대회 징크스'다. 4년이 더 흐른 2012년. 왕기춘은 '징크스' 탈출을 선언했다. "팬들이 런던에서 금메달을 기대하듯 나도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다. 기대만큼 걱정도 많이 하시는데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런던에서 감동을 선사하겠다."
▶인생의 멘토 원희형
왕기춘은 지난 3월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 평소 친형만큼 가까이 지내는 '멘토' 이원희 용인대 교수가 여자대표팀 코치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이 코치는 여자 대표팀을 지도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왕기춘의 훈련을 도와주고 있다. "형이 올림픽을 앞두고 어떻게 훈련을 했는지 주로 물어본다." 왕기춘은 일상부터 훈련까지 이 코치의 조언을 이정표 삼고 있다. 올해 초부터는 이 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사이클 훈련을 병행하고 있다. "개인 훈련시간에 보조 운동으로 사이클을 타고 있다. 원희형이 탔던 방법을 물어서 그대로 하고 있다. 하체를 강화하고 밸런스를 잡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24세의 젊은 혈기에 태릉선수촌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도 많이 느낀다. 다른 생각도 머릿속에 계속 떠 오른다. 하지만 '절제의 미학'까지 전수받았다. 그는 "훈련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그 시간에 유도 기술을 하나라도 더 생각하겠다"고 했다.
▶아들의 이름으로
왕기춘은 8세에 아버지 왕태연씨의 손에 이끌려 유도장을 찾았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작고 허약한 몸 때문이었다. 1m21의 신장에 19㎏의 가냘픈 몸. 제일 작은 도복도 몸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을 시작한 이후 제일 먼저 몸이 바뀌었다. 운동을 시작한 이듬해 한 끼 식사로 공기밥 아홉그릇을 먹었을 때도 있다. 1년 만에 12㎏이 쪘다. 운동을 못할 때도,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어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을때도 부모님은 언제나 그에게 든든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월드 넘버 원' 자리를 차지했을 때도 부모님은 대회에 나서는 그를 따라다녔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도 함께 했다. 그러나 이번 런던올림픽에 부모님이 동행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가 갈 때마다 진다고 이번에는 안간다'고 하시더라." 어머니는 최근 건강이 좋지 않다. 왕기춘은 "아버지가 5월에 퇴직하셔서 이제 내가 가장이다. 꼭 금메달을 따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이라고 굳은 약속을 했다. 세계랭킹 1위 왕기춘의 금빛 메치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