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좋은데 뭔가 하나 빠진 듯한 미완의 대기. 발전 가능성이 크지만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유망주. 지난해까지 박병호(26)하면 떠오르던 이미지다. 박병호도 이런 편견 내지 선입관이 싫었겠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성남고를 졸업한 박병호는 2005년 드래프트 1순위로 LG에 입단했다. LG는 오른손 거포를 영입해 기대가 컸으나 박병호는 2005년 첫해부터 지난해까지 한 번도 풀타임으로 뛰지 못했다. 주전경쟁에서 밀려 꾸준하게 출전할 수 없었고, 군 복무에 따른 공백이 있었다. 2010년 4경기 연속 홈런을 때렸을 때 각종 미디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만년 유망주 박병호, 드디어 폭발하나'같은 제목을 뽑았다. 하지만 박병호의 맹타는 반짝 활약에 그쳤다. 좋은 자질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그 무엇을 채우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랬던 박병호가 올시즌 보란듯이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 6월 18일 현재 타율 2할9푼3리(13위), 홈런 14개(공동 3위) 장타율 5할8푼7리(3위). 가장 눈에 띄는 게 타점이다. 타점 54개로 강정호(51개·홈런 19개 1위, 장타율 7할1푼3리 1위) 박석민 이승엽(이상 46개) 최 정(43개·홈런 15개 2위) 김태균(38개·타율 3할9푼9리 1위)을 제치고 이 부문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올해 박병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박흥식 코치가 만든 2012년형 박병호
이택근이 이미 완성된 타자, 강정호가 이미 풀타임을 경험한 반면, 박병호는 올해가 제대로 된 첫 시즌이다. 그만큼 여백이 크고 발전의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2012년 박병호가 2011년 박병호보다 모든 면에서 나아졌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진 건 공을 고르는 능력, 선구완이다. 박흥식 타격코치는 "지난해까지는 배트를 휘둘러 운이 좋으면 맞아 넘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인 식의 타격을 했다. 하지만 올해는 공을 골라서, 보고 때리고 있다. 나쁜 공에 배트가 안 나가면서 상대 투수가 압박을 받게 되고, 그만큼 좋은 공을 때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실제로 박병호는 올시즌 볼넷 36개를 기록, 톱타자인 이용규(35개) 최희섭 김태균 정성훈(이상 34개)를 제치고 이 부문 1위다. '모아니면 도'식의 타격을 했던 박병호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박흥식 코치는 스프링캠프부터 박병호에게 타격 때 오른쪽 골반을 중심축으로 두고 스윙을 하라고 강조했다. 뒤쪽에 무게 중심을 안정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라는 주문이다. 공을 반 개 정도 더 보고 때릴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작은 변화가 큰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야구에서는 특히 더.
물론, 김시진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 또한 빠트릴 수 없다. 지난해 박병호를 LG에서 데려온 김시진 감독은 시즌 개막 전부터 "우리 팀의 4번 타자는 너뿐이다. 삼진을 먹어도 좋으니 풀스윙을 하라"고 믿음을 실어줬다.
▶해결사의 첫번째 덕목=강한 심장
감독이 4번 타자에게 기대하는 첫 번째 역할은 타점 생산. 도루(3개)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상위권에 올라 있는 박병호지만 홈런과 장타율에서는 강정호, 타율에서는 김태균 이승엽에 밀린다. 그런데도 최근 한 달 간 타점 1위를 지키고 있다.
찬스 때 집중력에서 달랐다. 박병호는 주자가 득점권에 있는 상황에서 타율 3할5푼, 42타점, 장타율 6할6푼2리를 기록했다. 득점권 타율이 시즌 타율보다 5푼 이상, 장타율이 8푼 가까이 높다. 박병호는 득점권 타율에서 이승엽(3할6푼1리) 김태균(3할7푼), 득점권 장타율에서 박용택(7할1푼8리)에 뒤지지만 득점권에서 때린 25개의 안타 중 10개가 2루타, 4개가 홈런이었다. 득점 찬스가 몰리는 4번 타자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데, 첫 풀타임 시즌인 박병호가 이를 확실하게 극복했다고 봐야 한다. 넥센 코칭스태프는 지난 시즌 4번이었던 강정호의 부담을 덜기 위해 5번으로 타순을 조정했다. 4번 타자 박병호 카드는 올해 넥센의 최대 히드작이다.
넥센 관계자는 "박병호가 자신은 예민한 성격이라는 말을 하는데, 실제로 곁에서 보면 박빙의 승부 때 긴장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 강심장이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박병호는 지금도 진화한다
"너는 아직도 멀었다." 박흥식 코치가 박병호에게 농담을 섞어 자주 하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야구가 잘 된다고 안주하지 말고, 긴장의 끈을 놓지 말하는 당부가 담겨 있다. 박흥식 코치는 박병호를 이승엽과 비교했다. "최고인 스타인 이승엽이 항상 겸손하고 예의가 바른 것처럼 박병호도 항상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의가 바른 착한 친구다"고 했다.
박흥식 코치는 17일 KIA전 3회 박병호의 시즌 15호 중월 홈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박병호가 때린 몸쪽 공이 막힌 듯 했는데 쭉쭉 뻗어가 목동구장 백스크린을 때렸다. 박병호는 최근 상대 투수의 몸쪽 승부에 고전했다. 막힌 타구가 파울이 되거나 외야 플라이가 되곤 했다. 이런 박병호에게 팔 전체를 사용해 배트를 휘두르지 말고 간결하게 안쪽으로 스윙을 해보라는 말을 했는데, 홈런이 된 것이다. 박병호의 빠른 응용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번에 포진한 이택근, 5번에 버티고 있는 강정호의 존재감도 타점 생산에 도움이 크다. 셋이서 중심타선을 구축하면서 상대 투수가 피하지 못하고 정면 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시진 감독은 시즌을 앞두고 박병호에게 타율 2할7푼, 25홈런, 70~80타점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시진은 감독은 목표치를 크게 수정해야할 것 같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