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다. 10여년 전 막내에서 어느덧 최고참급이 됐다. '노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들은 세월을 잊은 듯하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올시즌 삼성화재의 프로 통산 6번째 우승을 일군 노장 3인방 석진욱(36) 여오현(34) 고희진(32) 얘기다. 경기도 용인 팀숙소에서 만난 이들과 유쾌·상쾌·통쾌한 인터뷰를 가졌다.
노장 3인방 중 가장 어린 주장 고희진이 먼저 유쾌한 농담을 던졌다. "아내가 진욱이 형과 오현이 형하고 어울리지 말래요. 노장이라고….(웃음)" 그러자 석진욱(36)은 "그래, 넌 아직 노장이 아니야"라고 받아쳤다. 이내 고희진은 "형들과 있으면 노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형들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하겠냐'고 생각한다. 이 중 막내이기 때문에 더 힘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석진욱(1999년 입단)과 여오현(2000년 입단)은 한솥밥을 먹은지 무려 12년이나 됐다. 2003년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은 고희진은 9년간 동고동락했다. 가족들보다 함께한 시간이 더 많다.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친형제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철칙이 있다. '친한 사람일수록 더 엄격하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고희진은 "친분이 두터울수록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오현이 형은 아직까지 '석 선배님'이라 부를 정도"라고 설명했다. 후배라고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고희진은 팀의 얼굴인 주장이다. 석진욱과 여오현은 외출 시 고희진에게 보고를 한다. 고희진은 "안해도 되는데 꼭 한다"라고 말하지만, 석진욱과 여오현은 "주장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니 강한 믿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고희진은 "내가 하자고 하면 형들은 불평없이 따라준다. 서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훈련에서 믿음이 있어야 경기에서도 효과가 발휘된다. 진욱이 형이나 오현이 형이 리시브를 하면 어디로 볼이오는지 알아 속공이 편하다"고 설명했다.
노장 3인방의 몸 상태와 기량은 매시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올시즌도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버텨내고 팀을 우승까지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정신력이었다. 리베로 여오현은 "감독님께서 체력적으로 많이 떨어졌다고 하더라. 그러나 이 부분도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을 다잡는 것이 가장 큰 부분이다"고 했다.
올시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다. 석진욱과 고희진의 공통 대답이 나왔다. 5, 6라운드 연속 대한항공전 0대3 참패였다. 석진욱은 "이긴 것은 금방 잊어버린다. 패했을 때가 오래 남는다. 대한항공에 0대3으로 졌을 때 '올해는 안되려나'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희진은 "당시 우리가 자초한 일이었다.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충격이 컸다"고 회상했다. 여오현은 "LIG손해보험과의 개막전(3대2 승)을 어렵게 이긴 것이 좋았다. 첫 단추를 힘들게 꼈기 때문에 자만심이 생기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노장 3인방이 '삼성화재맨'으로 활약하며 이룩한 우승 횟수는 총 20번이다. 더이상 우승과 현역 생활에 대한 미련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기자의 착오였다. "할 수 있을 때까지 뛰겠다"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석진욱은 "내 체력을 알고 있다. 후배들이 좀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 삼성화재가 특정선수 몇명이 빠지면 문제다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선수가 빠져도 우승을 해왔다. 이젠 후배들이 더 성장해 '삼성화재가 이래서 강팀이구나'라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여오현도 "좋은 리베가 들어오는 것은 나에게 활력소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아직 욕심은 코트 위에서 뛰는 것이다. 부상없이 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막내 고희진 역시 "무릎 수술 이후 몸이 안좋아서 배구를 안하면 무엇을 할까 고민했는데 2년 전부터는 운동을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내에게도 '운동을 오래해서 노후까지 생각할 수 있게 벌어볼께'라고 말했다. 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용인=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