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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 벼락골' 광주 김은선의 우여곡절 축구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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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무명이었다. 지난시즌 K-리그 무대를 누볐지만 그를 아는 축구 팬들은 많지 않았다. 많은 공격포인트를 올리는 포지션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그가 기지개를 활짝 폈다. 11일 포항전에서 축구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광주FC 미드필더 김·은·선(24)이다. '30초 벼락골'의 주인공이 됐다. 주심이 경기시작 휘슬을 분지 30초 만에 상대 골망을 흔들었다. 29경기 만에 터뜨린 감격적인 K-리그 데뷔골의 느낌은 얼떨떨했다. "골을 넣고 어리둥절했어요. 선수들이 와서 격려해준 뒤 실감이 났죠.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졌어요."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했지만, 사실 축구선수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 인천 만수북초 1학년 때 등교하다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축구부원들이 운동장 한 가운데서 단체로 기합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런데 축구를 하기 위해 4학년 때 전학온 친구가 운동신경이 뛰어난 김은선에게 줄기차게 축구부 입단을 권유했다. 김은선은 계속 거절했지만, 축구선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있었다. 2000년 4월 26일 한-일전(1대0 승)에서 하석주의 통렬한 왼발 중거리슛이 작렬하는 장면에 감명을 받은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게 된 김은선은 외롭지 않았다. 목숨보다 소중한 한살 차 남동생(김은수)도 함께 축구선수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처럼 감독들의 눈을 사로잡지 못했다. 동생이 축구선수로 성공하기에 다소 재능이 부족했다. 그래서 김은선은 동생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항상 동생과 함께 들어가는 조건을 내걸었다.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김은선은 동생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김은선은 동생과 초·중(인천 만수중)·고(동대부속고)·대(대구대)학교를 모두 같이 다녔다. 현재 동생은 대구에서 지도자와 심판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생긴 오기는 김은선이 거친 프로세계에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 이 오기는 유독 강한 승부욕으로 이어졌다. 다른 선수들이 비해 공을 뺏는 능력이 좋았던 김은선은 경기를 거듭할 수록 공을 뺏는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비능력이 좋아졌다. 김은선은 "나는 공을 빼앗으면 희열을 느낀다. 공격수가 나를 제쳐도 끝까지 쫓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못 따라가게 되면 매우 화가 난다. 승부욕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특히 강한 자존심때문에 '칼잡이', '독불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해 창단한 광주에 우선지명을 받아 프로선수가 된 김은선의 꿈은 태극마크를 달아보는 것이다. 김은선은 "단, 대표팀에 한 두 번 불려갔다 오는 선수가 아닌, 박지성과 이영표처럼 붙박이 선수로 오랫동안 활약하는 것이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꾸준히 노력하고 성장한다면 못이룰 꿈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K-리그 2년차 광주의 2대 주장을 맡았다. 동시에 올시즌 기대되는 키 플레이어 3인에 선정됐다. 그러나 김은선은 쑥쓰러워했다. "나는 '키 플레이어'라고 불릴 만한 선수가 아니다. 겸손한 것이 아니다. 내가 골을 넣고 해결하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잘못 뽑은 것 같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광주=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