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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에서 만난 김병현,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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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만 하고, 말도 안통하는 아기. 그게 딱 제 모습이더군요."

과거의 김병현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었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그를 뜻하는 수식어는 상반됐다. '언더핸드스로의 정석'이나 '성공한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표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고, '문제아'나 '독불장군'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렇듯 최고의 찬사와 최악의 비난을 한꺼번에 경험한 인물도 드물다. 어찌보면 그만큼 김병현의 존재감이 엄청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찬사보다는 비난이 좀 더 많았다. 돌발행동을 일삼고, 팀과 트러블을 빚은데다 한동안 아예 야구와 등졌기 때문이다.

31일(한국시각) 애리조나 서프라이즈시의 '텍사스 레인저스 콤플렉스'에서 만난 김병현은 말한다. "과거의 나는 문제가 많았다. 오로지 야구하나만 알았다. 일종의 강박관념도 있다보니 야구가 잘 되지 않자 희망을 잃고 그냥 멍하게 살았다". 그런 자기반성을 한다는 것 자체가 김병현이 달라졌다는 증거다.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첫 딸(민주)을 얻으며 김병현은 변했다. 새로운 생명을 보며 김병현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아기를 기르면서 내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아기들은 늘 제멋대로 하고, 의사소통도 안되지 않나. 예전의 내가 꼭 그랬다."

말 뿐만이 아니다. 김병현의 일거수일투족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30대의 어른이 일순간 모든 생활습관을 고치기는 힘들다. 그래도 김병현은 노력하고 있다. 생활 하나하나에서 그런 노력이 보인다.

▶이어폰을 뺐다.('주변'의 이야기를 듣겠다)

메이저리그 애리조나 시절, 김병현의 트레이드 마크는 '이어폰'이었다. 마운드나 덕아웃을 제외한 장소에서 김병현은 늘 이어폰을 꼽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려는 목적보다는 귀찮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려는 목적이 컸다. 애리조나 시절 후반부터 김병현은 동료나 언론과의 접촉을 힘들어했다. 동료에게서는 '진정한 친구'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고, 언론은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에서 잘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성적이 잘 안나오자 친하던 동료들이 말을 걸지 않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의 김병현에게 이런 변화는 상처가 됐다. 상처를 덮기 위해 김병현은 '외면'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넥센에 복귀한 김병현은 더 이상 '이어폰'을 쓰지 않는다. 의사소통이 불편했던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자신의 속내를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료와 잘 어울리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일단 말은 잘 통하잖아요"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김병현의 모습에서 미국시절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굳이 귀를 틀어막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새로 만나는 동료들의 의견과 자신의 복귀를 환영하는 취재진의 질문에 귀를 활짝 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스스로 느낀 것으로 해석된다. 김병현은 이제 이어폰을 쓰지 않는다.

▶앞을 바라본다.('카메라'를 피하지 않겠다)

또 다른 변화도 있다. 자신을 향한 카메라 렌즈를 편안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때때로 웃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다.

김병현의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김병현은 메이저리그 시절 "원래 사진찍기를 싫어한다. 우리집에는 가족사진도 없다"며 노출을 꺼렸다. 그러면서 생긴 습관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게된 것이다. 모자를 푹 눌러쓰는 일이 많아졌고, 카메라가 보이면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넥센 유니폼을 입은 김병현은 더 이상 모자를 눌러쓰거나 카메라를 피하지 않는다. 이왕 국내 복귀를 결정했고, 더 이상 자신을 오해하는 시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면서부터 당당함을 되찾은 결과다.

▶방문을 열었다.(이제 '동료'와 어울리겠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김병현은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그 시간을 통해 휴식과 평안을 얻는다. 스스로도 "생각할 것이 있을 때나 쉬고 싶을 때는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말한다. 이는 어쩔수 없는 개인의 취향이자 성격이다.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니고, 여전히 그런 성향은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 시절에 생긴 버릇이었다.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은연중 있는 메이저리그 선수들과는 '동료의식'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던 김병현은 어쩔 수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피곤하면 잠을 잤고, 심심하면 음악을 들었다.

그런데 김병현은 일부러 이런 모습을 버리려 노력 중이다. 사례가 있다. 지난 29일(한국시간), 넥센 선수단에 합류한 지 이틀 째 되는 날. 시차를 적응하기 위해 방에서 쉬던 김병현은 일부러 문을 열고 나와 동료들과 수다를 떨었다. 김병현은 "사실은 방에서 쉬는게 더 편한데, 빨리 팀에 적응할 필요가 있으니까 일부러 어울렸다. 몸은 좀 피곤해도, 편하게 웃고 떠드는 게 좋았다"고 설명했다. '나는 나'라는 의식을 버리고, '팀'이라는 큰 틀을 겸허히 수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프라이즈(애리조나)=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