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30분이 되자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셀틱 홈페이지에 접속하더니 셀틱 TV를 클릭했다. 경기가 시작되려면 30분이 남았지만 그는 아들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컴퓨터 책상 앞에 미리 앉았다. 셀틱 에이스 기성용(23)의 부친 기영옥 광주시축구협회장이었다. 14일 전남 광양의 한 아파트. 기자는 기 회장의 자택을 찾아 기성용이 출전한 셀틱의 경기를 함께 시청했다. 일명 '기성용 부친과 함께한 기성용 경기 시청기'다. 경기 내내 아쉬움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때로는 탄식도 이어졌다.
▶맨유-셀틱의 경기력 차이는?
14일 밤 12시에 셀틱 파크에서 시작되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SPL) 셀틱과 던디 유나이티드의 경기. 오후 11시 30분 셀틱의 홈페이지를 통해 기성용의 출전 여부를 확인했다. '기-차 듀오' 기성용과 차두리(32)는 나란히 교체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기 회장은 곧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더니 "성용이 교체 멤버야"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30일 아들이 있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기성용의 모친 남영숙씨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렸다. 짧은 통화가 이어졌다. 이렇게 부친은 한국에서, 모친은 스코틀랜드에서 각각 인터넷과 TV로 아들의 경기를 시청했다. 기 회장은 컴퓨터 옆에 있는 TV도 켰다. 같은 시각 한 스포츠 전문 채널에서는 맨유와 볼턴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주말마다 해외축구보는게 낙"이라고 말하던 기 회장은 두 경기를 동시에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성이도 교체 멤버네"라며 편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하지만 금호고와 광양제철고 축구부 감독으로 30년 가까이 축구를 지도해 온 그는 곧 매서운 눈으로 경기 분석에 들어갔다. "EPL과 SPL의 차이가 뭔줄 아십니까? 맨유는 수비부터 공격까지 선수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한 번에 움직입니다. 반면 셀틱은 맨유에 비해 선수간의 공간이 넓습니다. 그래서 경기 스피드에 차이가 납니다." TV와 컴퓨터 모니터가 바로 옆에 붙어 있어 경기 스피드 차이가 한 눈에 들어왔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전반 12분과 17분, 셀틱의 연속골이 터지자 기 회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조직력은 셀틱보다 던디가 더 좋습니다. 하지만 셀틱은 던디의 실수를 놓치지 않네요. 두 팀의 성적 차는 바로 저 골 결정력 차이 때문입니다." 다시 시선을 TV로 돌리자 마침 전반 21분 맨유 루니가 페널티킥을 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루니의 킥 동작을 본 기 회장은 순간 "왼쪽"을 외쳤고 루니는 골대 왼쪽으로 킥을 했다. 골키퍼도 같은 방향으로 몸을 날려 공을 막았다. 기 회장의 "선수들의 킥 준비 동작을 보면 대충 보입니다. 루니가 킥 직전에 몸을 왼쪽으로 꺾었는데 그 상황에서 오른쪽으로 차기는 힘들었을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지도자 경력이 30년에 가까운 감독의 예리한 눈이었다. 전반 45분, 최근 선수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미드필더 스콜스가 선제골을 넣자 기 회장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맨유가 은퇴한 선수를 복귀시킬정도로 선수가 없나요?"
마침 영국 일부 언론의 '중앙 미드필더가 부족한 맨유가 기성용을 영입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온 지 며칠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가 물었다. "기성용의 플레이스타일이 맨유와 어울릴까요?" 기 회장은 말을 아꼈다. "허허.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기성용의 교체 출전, 승리에도 웃지 못했다
기성용이 후반 20분 공격수 스톡스를 대신해 왼쪽 측면 공격수로 교체 출전했다. 하지만 1-2로 지고 있던 던디의 공격이 거세졌고 기성용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동해 수비에 힘을 보탰다. 후반 35분 기성용이 던디의 코너킥을 헤딩으로 걷어내자 기 회장은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그토록 바라던 헤딩이었다. 기 회장은 "성용이가 헤딩을 잘 안하는게 문제입니다. 헤딩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지 연습하라고 해도 잘 안합니다. 예전에 헤딩 골 넣으면 자동차라도 사주겠다고 했는데도…"라고 말했다. 8분 뒤 기 회장은 컴퓨터 모니터에 더욱 집중했다. 상대 페널티박스 밖 왼쪽에서 얻은 셀틱의 프리킥 기회. 전담 키커 기성용이 찰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공 앞에는 기성용이 아닌 크리스 커먼스가 자리했고 그가 찬 강한 프리킥은 수비벽에 맞고 흘렀다. 탄식이 이어졌다. "성용이가 좋아하는 자리인데, 저때는 강한 킥보다 골대 구석으로 꺾어차야 했어요." 이어 셀틱의 마지막 공격이 이어졌다. 후반 종료 직전 상대 페널티박스 앞에서 기성용이 패스를 받았고 왼쪽으로 방향을 꺾으며 드리블을 하다 수비에 막혔다. 더 큰 탄식과 그리고 강한 질책의 목소리가 집안을 휘 감았다. "퍼스트 터치가 안돼서 그런거야. 방향을 오른쪽으로 꺾었어야지!" 기 회장의 한숨과 함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셀틱은 2대1로 승리를 거뒀고 리그 11연승으로 선두를 유지했다. 그러나 기 회장은 웃지 않았다. 아들의 움직임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곧 바로 컴퓨터를 끈 셀틱 경기 시청의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고 했다. "40분 뒤에 성용이에게 전화할 겁니다. 씻고 나오는데 그 정도 시간 걸립니다. 항상 경기가 끝나면 전화해서 '다친 곳은 없는지' 묻습니다. 경기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눕니다. 이렇게 새벽에 경기가 열릴 때 전화까지 하면 밤을 꼬박 샙니다." 기성용의 K-리그 출전 경기를 모두 경기장에서 관전했다는 그는 셀틱의 모든 경기를 한국에서 시청하고 있었다. 시계는 오전 2시 30분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또렷했다.
광양=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