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연극 '대학살의 신'
제목은 무시무시하지만(?) 내용은 유쾌하기 그지 없다. 무엇보다 연기파로 소문난 네 배우가 보여주는 앙상블이 압권이다. 알렝 역의 박지일, 그의 아내인 아네트 역의 서주희, 미셀 역의 이대연, 그의 아내 베로니끄 역의 이연규 등은 다 일당백인 배우들이다. 이들 넷이 나서는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팬들로서도 큰 행운이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소화하는 능력, 상대에 대한 배려, 불꽃 튀는 연기대결의 참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서주희가 밥통같이 생긴 큰 대야를 들고 갈짓자로 무대를 활보하며 속칭 '오바이트'를 할 때의 표정과 동작은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구토물이 객석 앞줄까지 튈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배우들의 표정, 목소리 톤, 몸짓 등을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즐길 수 있다. 언제 이런 연극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국내에서도 '아트'란 작품으로 유명한 토니상 수상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작품이다. '아트'가 하얀 도화지를 최신 트렌드의 명화라 우기는 한 친구를 놓고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렸다면,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의 싸움 때문에 만난 두 쌍의 부부 이야기이다.
'아트'와 비슷하게 큰 부족함이 없이 사는 교양있는 중산층의 가식과 허위의식을 유쾌하게 그렸다. 변호사, 작가, 사업가 등의 직업상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대화를 나누지만 은근히 뼈가 있는 단어들을 교환하다 설전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엉뚱하게도 같은 편인 배우자들을 공격하면서 육탄전으로 업그레이드된다. 교양과 학식, 사회적 지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먼 아프리카 미개 사회에서 벌어진 대학살 사건의 주동자와 비슷한 DNA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야스미나 레자의 장점은 심각한 주제를 집약적으로 풍성하게 전달하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다는 것이다. 장르상 블랙 코미디이겠으나 옛 선배들의 그것처럼 보고나면 기분이 찜찜해지거나, 뭔 얘기를 하는지 아리송하거나 하지 않고 '아, 맞아, 나도 저런 면이 있어'라고 쿨하게 인정하게 만든다.
메시지 보다는 연기 앙상블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연출 한태숙, 신시컴퍼니 제작. 2월12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김형중 기자 telos21@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