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야구를 보여주겠다."(박찬호)
"개인성적보다 우승이 먼저다."(김태균)
즐거운 희망과 야망이 교차한 새해 첫 출발이었다. 6일 오전 10시 대전구장. 한화 구단이 새해 '용틀임'을 시작하는 시무식이 열렸다.
한참 진행중인 리빌딩 공사로 공사판이 된 경기장 주변은 이틀 전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그라운드와 어우러져 겉보기엔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한화 선수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자 뜨거운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돌아온 특급스타 박찬호(39)와 김태균(30)이 공식적으로 첫 훈련을 하는 날이어서 그 열기는 더했다.
취재-사진 기자들로 구성된 취재진은 40여명에 달했고, 방송사 카메라만 16개였다. 한화의 새출발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박찬호마저 "미국에 진출했을 때도 이렇게 많은 취재진을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시무식이 시작되자 박찬호는 김태균 류현진과 함께 선수단 대열 맨 뒤쪽에 섰다.
박찬호는 초등학교 입학식에 나온 어린이처럼 적잖이 흥분된 모습이었다. 김태균은 긴 머리를 싹둑 자른 채 '밤송이' 머리를 선보였다. "새 시즌을 맞이하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짧게 밀어봤다"고 했다.
시무식이 진행되는 동안 박찬호는 틈이 날때마다 류현진의 손을 꼭 잡으며 연신 말을 걸었다. "텃세 부리지 말고, 잘 봐달라. '왕따'시키지 말라고 아부했다"는 박찬호의 설명이다.
10분간의 시무식이 끝난 뒤 본격적인 훈련시작? 하지만 박찬호의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식을 줄 모르는 관심 때문이다.
다른 선수들이 경기장 한켠에서 워밍업과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 동안 박찬호는 김태균 류현진 송신영과 함께 취재진 인터뷰에 응해야 했다.
이들 가운데 박찬호는 '3차'를 뛰어야 했다. 방송 기자단과의 합동 인터뷰에 이어 대전지역 기자단 기자회견, 그것도 모자라 한화 담당 기자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박찬호는 신변 정리를 위해 7일 미국으로 떠났다가 16일 스프링캠프 장소인 애리조나로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에 한화 구단 측이 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다.
그 사이 김태균은 오렌지색 한화 유니폼을 입고 몸풀기를 계속했다. 훈련 첫 날이라 방망이는 잡지 않았다. 한화는 제법 쌀쌀한 날씨 때문에 당분간 오전에 간단한 훈련만 하기로 했다.
박찬호는 바빴다. 대전지역 기자단과의 '2차'를 마치고 선수단 회의실에서 오붓하게 마련된 담당 기자 티타임이 돼서야 한숨을 돌리는 듯 했다.
완전히 달라진 박찬호였다. 무려 45분 동안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한화 구단 관계자는 "박찬호가 저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말솜씨가 청산유수였다.
"내가 '1박2일' 출신이라서 예능감이 생겼다"는 게 박찬호의 너스레였다. 박찬호는 2010년 KBS의 유명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 화제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 기운을 받았다는 것이다.
박찬호는 20년 전 공주고 시절 대전구장을 방문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고향에 온 것처럼 들뜬다고 말했다. 당시 고교 특급 투수로 한화 구단(당시 빙그레)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박찬호는 장종훈(2군 타격코치)의 35호 홈런을 직접 목격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단다.
박찬호는 팀 분위기를 강조했다. 딱딱한 선-후배 위계질서나 승패에 얽매이기에 앞서 즐겁고 신나는 야구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박찬호는 미국에서 가장 듣기 좋아했던 말 두 가지를 소개했다.
'Let's have fun(재밌게 즐겨보자)'과 '찹(chop·도끼로 장작을 패다. 위기를 잘 끊어낸다는 뜻)'이었다. 미국에서 동료들과 'Let's have fun'을 인삿말로 주고 받으며 힘을 얻었던 것처럼 한화의 팀 분위기도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다.
박찬호는 "우리끼리 개그콘서트 같은 분위기도 만들고 싶다"면서 "김태균이 군기반장을 한다고 했으니 나는 류현진을 앞세워 개그콘서트를 하면서 분위기를 조절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찹'은 박찬호의 미국 시절 별명이란다. 박찬호는 후배들이 자신을 어렵게 대하면서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형'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헤이(hey), 찹'이라고 별명을 불러주면 좋겠다고 했다.
선배가 후배를 다그치고, 후배가 선배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격의 없이 지내는 게 작은 바람이라는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낮 12시가 넘어 다른 선수들의 훈련이 마무리될 때가 됐다. "밖에 나가면 추우니 따뜻한 여기서 이야기나 더 하자"고 하던 박찬호는 그제서야 "박찬호라고 예외는 절대 없다"는 정민철 투수코치의 부름을 받고 뒤늦은 훈련을 시작했다.
마침내 글러브에 볼을 넣고 그라운드에 올라선 박찬호는 불펜포수 조세범이 잡아주는 가운데 캐치볼을 했다. 지켜보고 있던 정 코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먼 거리에서 가볍게 던지는 몸풀이 피칭이었지만 포수 미트에 꽂히는 소리는 우렁찼다.
체력관리를 잘해서 힘이 넘친다는 박찬호의 자신감이 팡팡 미트 소리로 확인되고 있었다. 대전=최만식 기자 cm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