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0일 정오, 경기도 철원의 신철원초등학교 체육관을 찾았다. 4교시 6학년 국화반의 체육 수업이 한창이었다. 파란 유도복을 맞춰 입은 남녀 아이들이 카메라를 보더니 반색한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2인 1조로 겨루기 동작을 시연해 보인다. 승부의 세계에 몰입한 남자아이들은 표정들이 제법 진지하다. 체격도 기량도 제각각이지만 모두들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상대의 도복 옷깃을 낚아챈 여자아이들도 매트 위를 뒹굴며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인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는다 싶더니 결국은 까르르 웃음보가 터진다.
일주일에 한번, 이 학교의 체육시간은 유도 수업으로 진행된다. 전교생이 참가하는 학년별 유도대회가 올해로 벌써 8회째를 맞았다. 매년 9월, 꼬박 4일동안 4-5-6학년 학생들이 학년별 반 대항전과 개인전을 치르는 교내 최대 축제다. 체육관 사방 벽면은 온통 선수들이 따온 상장과 상패, 플래카드로 가득차 있다. 전교생이 즐기는 유도는 힘이 세다.
강원도 철원은 '유도의 메카'로 통한다. 전국소년체전, 전국체전 등 유수한 전국 대회에서 '강원도의 힘'을 보여온 메달밭이다. 철원 유도의 신화는 12년 전 이 학교에서 시작됐다. 대학 졸업 후 꿈을 접고 철원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용인대 유도선수 출신 오정석 감독(현 철원군청 감독)이 학교로 들어온 지난 1999년부터다. 철원교육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지역 주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다용도교실에 매트를 깔았고, 그렇게 완성된 유도 전용 체육관에서 전교생이 체육시간에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 감독은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 배우는 유도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철원의 아이들이 유도에 비범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신철원중, 신철원고, 철원여중, 철원여고 등 각급 학교에도 유도 붐이 이어졌다. 12년 전 뿌린 씨앗은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 도 대회는 물론 전국 규모 대회에서 메달을 쓸어담았다. 올해 소년체전에서도 신철원초등학교는 5체급 중 2체급을 석권했다. 지난 여름 하계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올림픽 유망주' 김원진(19·용인대)도 이 학교 출신이다.
20여분간 겨루기를 마친 아이들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예를 갖춘 후 서로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했다. 수업의 마지막 순서는 낙법 시범이다. 2011년 전국소년체전 66㎏ 이하급 금메달리스트인 최태환군(13)이 친구들 앞에 나섰다. 올해 체전은 물론 교보생명컵, 그래미컵 등 각종 대회에서 1위를 휩쓴 동급 최강이다. 전광석화처럼 날아들더니 엎드린 친구들의 등을 훌쩍 뛰어넘었다. 뜨거운 환호성이 쏟아졌다. '투혼의 파이터' 최민호 선수의 팬인 최태환군은 초등학교 3학년때 처음 유도에 입문했다. 유도를 배우면서 고질병이던 천식이 사라졌다고 했다. "유도는 예를 중요시하는 운동인 만큼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같이 유도를 하니 품성도 바르게 되고 체력도 튼튼해진다"며 예찬론을 펼쳤다. 한반에 3~4명은 최태환군과 같은 선수급 기량을 보유하고 있다. 수업중엔 선생님을 도와 친구들에게 직접 유도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수업시간 내내 즐거운 몸싸움을 벌이던 여학생들에게도 유도 수업 소감을 물었다. 국화반에서 유도를 가장 잘한다는 장나리양(13)은 "유도를 하면 힘이 세지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도 확 풀려요"며 환하게 웃었다. 새침하고 가냘픈 외모의 안혜원양(13) 역시 "선수처럼 잘하지 못해도 배우는 게 재밌다"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잘나가는 철원 유도의 뒤에는 어려서부터 놀이처럼 즐겨온 학교체육이 있었다. 남녀노소, 너나 할 것 없이 유도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났다. 오래전 누군가 학교에서 시작한 작은 걸음이 마을을 바꾸고, 삶을 바꿨다. 철원=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