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톱타자 김주찬의 방망이는 용광로 속 무쇠처럼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승리의 시발점이 되지 못했다.
톱타자와 2번타자를 묶어 야구용어로 '테이블세터'라고 한다. 후속 클린업트리오(3~5번)가 득점타를 기록하기 쉽도록 '밥상'을 차리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에게 출루능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일단 나가야서 테이블을 차려놔야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톱타자는 더 좋은 선구안과 출루능력을 갖춰야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타석에 나오는 까닭에 톱타자가 많은 안타를 때려냈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팀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롯데 붙박이 1번 타자 김주찬은 23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SK와의 플레이오프 최종 5차전에서 자신의 임무를 100% 수행했다. 5타수 4안타에 1득점 1도루면 그의 활약은 인정해줘야 한다. 게다가 2루타와 3루타도 1개씩 있었다. 홈런만 쳤다면 포스트시즌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할 뻔했다. 롯데가 1회말 선취점을 올린 것도 김주찬이 선두타자로 나와 SK 선발 김광현으로부터 3루타를 쳐낸 덕분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김주찬의 맹타는 팀의 역전패로 빛이 바랬다. 공교롭게도 롯데는 김주찬이 한 경기 3안타 이상을 기록했을 때 대부분 이겼다. 김주찬은 지난 4월23일 부산 SK전 때 상대투수 매그레인의 투구에 맞아 오른손등에 미세골절상을 입은 뒤 두 달 가까이 재활한 끝에 6월21일 1군에 복귀했다. 그때부터 김주찬은 다시 톱타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냈다. 복귀 후 무려 24번의 멀티히트(한 경기 2안타 이상)를 달성했는데, 특히 이날 경기 전까지 김주찬이 3개 이상의 안타를 쳤을 때 롯데는 무려 7연승을 거뒀다. 지난 8월16일 광주 KIA전부터 지난 16일 부산에서 열린 SK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까지다. 승률이 무려 8할1푼8리나 됐다. 롯데 공격의 선봉장인 김주찬의 방망이가 뜨겁게 불타오르면서 팀 전체의 공격력과 득점력이 상승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놀라운 상승세의 기록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끊기고 말았다. 23일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롯데가 결국 4대8로 지면서 김주찬의 맹타는 무색해졌다.
김주찬이 무려 4개의 안타를 기록하며 펄펄 날았음에도 롯데가 진 것은 '단체종목'이라는 야구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야구는 혼자 잘해서는 이길 수 없는 경기다. 김주찬이 5타수 4안타를 기록하는 동안 또 다른 테이블세터 2번 손아섭은 4타수 무안타로 침묵했다. 전혀 진루타를 치지 못하다가 7회 선두타자 김주찬이 중전안타를 친 뒤 희생번트로 한 베이스 보냈을 뿐이다. 3번 전준우가 1회 우전 2루타로 3루주자 김주찬을 홈에 불러들인 것을 제외하고, 4번 이대호나 5번 홍성흔은 김주찬의 안타를 득점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김주찬은 안타를 치고 나간 뒤 누상에서 고립되고만 셈이다. 김주찬의 놀라운 맹타 기록은 이렇게 빛이 바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부산=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