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에게는 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시샘과 텃세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2001년에는 드래프트 문제로 법적 투쟁을 벌였다. 재판은 2년간 이어졌다. 1심에서 져 항소심까지 간 끝에 판결을 뒤집었다.
2009년 9월에는 토사구팽을 당했다. 1부 리그 우승이 목전이었다. 그러나 구단 고위층의 과도한 간섭으로 끝내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한 달여후 그 팀은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꿈이 사라졌다. 명예도 땅에 떨어진 듯했다. 오랜 타향살이에 지쳐 쉬고 싶었다. 중국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난해 3월 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1998년 충칭의 지휘봉을 잡아 첫 발을 뗀 후 어느덧 13년이 흘렸다.
이장수 광저우 헝다 감독(55)의 '차이나 드림'이 28일 마침내 완성됐다. 충칭(1998~2001년)에서 칭다오(2002~2003년) 베이징(2007~2009년)을 거쳐 광저우에서 신화를 썼다.
드라마틱했다. 이 감독은 이날 샨시와의 26라운드에서 4대1로 대승했다. 승점 61(18승7무1패)을 기록했다. 두 시간여 뒤 2위 베이징 궈안이 산둥과 격돌했다. 1대1로 비기며 승점 47(12승11무3패)에 그쳤다. 공교롭게 베이징은 그를 버린 팀이다. 광저우는 남은 4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었다.
저녁 식사 도중 낭보가 날아왔다. 지도자의 길로 들어 선 후 첫 1부 리그 우승의 환희를 누렸다.
이날 밤 수화기 넘어 들려 온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모든 것을 털어버린 듯 "소감이랄 게 뭐 있어, 기쁘지"라며 화통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말 할 것은 다했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정규리그 우승은 처음이야. 얼떨떨하네"라며 감격해 했다.
무늬는 다르지만 2년 연속 우승이다. 이 감독은 지난해 2부의 광저우를 우승시켜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승격팀이 1부 리그 패권을 거머쥔 것은 이례적이다. 독일의 카이저슬라우테른이 1997년 승격해 1998년 1부에서 우승한 것이 거의 유일하다. 충칭과 칭다오에서 두 차례 FA컵 우승컵을 차지한 것과도 차원이 달랐다.
리장주(이장수의 중국어 발음)는 왜 특별할까. 원칙주의가 빛을 봤다. 중국 프로축구는 몇 해전까지만 해도 승부조작으로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늘 꿋꿋했다. 광저우가 삼고초려 끝에 이 감독을 영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동산·건설 재벌인 헝다 그룹은 이 감독의 뚝심을 믿었다. 지원도 파격적이었다. 지난해 중국의 간판 스트라이커 가오린를 비롯해 찰턴과 셀틱에서 뛴 정즈와 PSV 에인트호벤 출신 순시앙을 영입했다. 올해는 1000만달러(약 117억원)의 이적료를 주고 브라질리그 최우수선수 출신인 콘카(아르헨티나)를 데리고 왔다.
통솔력이 돋보였다. 이 감독은 누구든 특별 대우하지 않았다. 객관적이고 냉정한 경쟁 체제를 유지했다. 선수들도 군말이 없었다. 구단은 선수 영입, 평가, 보너스 지급 등 선수단 운영에 대해 이 감독에게 전권을 줬다.
그가 도입한 인센티브 제도는 기발했다. 선수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른바 '513 시스템'이다. 이기면 500만위안(약 9억2000만원). 비기면 100만위안(1억 8000만원)의 팀 수당을 받지만 패할 경우 300만위안(5억 5000만원)을 벌금으로 내는 제도다. 광저우가 26경기에서 18승7무1패를 기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들은 선수층이 두텁다고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15~16명 정도를 1군 선수로 활용할 수 있는데 중후반부에는 매 경기 3명 정도가 부상으로 이탈해 있었다. 구단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만큼 책임감이 컸다."
광저우는 내년 시즌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한다. "내년에 1부 리그에서 우승하는 것이 목표했다. 조기에 목표를 달성했다. 광저우는 처음으로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게 된다. 아시아 무대에서도 정상에 오르고 싶다."
한국 출신 리장주가 중국 대륙을 삼켰다. 아시아 정상을 향해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