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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 부정 출발 미스터리, 긴장인가 방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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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는 믿기지 않는 듯 한 동안 정신나간 사람 처럼 걸어다녔다. 유니폼으로 얼굴을 가렸다. 화난 표정으로 대구스타디움의 콘크리트 벽을 내리쳤다.

'전설'이 되겠다던 우사인 볼트(25·자메이카)는 어이없이 부정 출발에 발목이 잡혔다. 뛰어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볼트는 무엇에 쫓긴 걸까. 그는 28일 벌어진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선에서 5번 레인에 섰다. 좌측(4번 레인)에 미국의 월터 딕스, 오른쪽(6번 레인)에 요한 블레이크(자메이카)가 배정됐다.

볼트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했다. 다른 레이스 때와 준비 의식이 똑같았다. 여부만만해 조금은 오만한 듯 보였다. 자신감이 넘쳤다. 유니폼에 새겨진 자메이카 국기에 입맞춤까지 했다.

선수 소개가 끝나고 심판은 총성을 울리기 위한 준비 동안을 알리는 콜인 '셋(set)'을 외쳤다.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총이 발사되지도 않았는데 한 명이 스타팅 블럭을 차고 나갔다. 볼트였다. 관중석에서 '으악'하는 비명이 쏟아졌다.

볼트는 겉과 달리 심리적으로 흔들렸다. 과도한 긴장이 대재앙을 불러왔다. 그렇다고 강심장 볼트가 뭐 때문에 평정심이 무너진 걸까.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다. 스타트는 장신(1m96)의 볼트가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우승 당시에도 출발 반응속도가 0.165초로 8명 중 7위였다. 1년 뒤 베를린대회에선 0.146초로 8명 중 6위였다. 스타트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선 다시 나빠졌다. 예선에선 0.153초였고, 준결선에선 0.164초로 더 늦었다. 볼트는 출발 반응속도가 좀 떨어지더라도 50~60m 구간에서 폭발적인 스피드로 상대를 제압하는 레이스를 했다. 따라서 스타트에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볼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09년 베를린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연달아 세계기록을 세우며 정상에 올랐다. 이번 대구 대회에서 2연패를 노렸다. 이번 대회 목표는 기록 경신이 아닌 타이틀 방어였다. 볼트는 지난해 아킬레스건과 허리를 다쳤고 현재 몸상태가 최고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타이틀 방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볼트가 바란 육상의 전설이 되기 위해서 우승이 필요했다. 그에 앞선 육상의 레전드인 칼 루이스(세계육상 3회, 올림픽 2회)와 모리스 그린(세계육상 3회, 올림픽 1회, 이상 미국)은 볼트 보다 더 많은 우승 경험이 있다. 볼트(세계육상 1회, 올림픽 1회)는 두 전설 보다 기록에서 앞섰지만 우승 경험 횟수가 떨어진다.

볼트가 훈련 파트너인 요한 블레이크의 강력한 도전에 긴장했을 수도 있다. '제2의 볼트'로 평가받는 블레이크는 준결선에서 경쾌한 레이스로 9초95를 기록, 1위로 결선에 올랐다. 출발에서 뒤쳐질 경우 후배에게 지는 수모를 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번 레이스엔 공교롭게 볼트와 최근 3년 동안 줄곧 경합했던 빅2 타이슨 게이(미국)와 아사파 파월(자메이카)이 부상으로 불참했다. 메달 색깔을 다퉈왔던 라이벌들의 몰락이 볼트에겐 공허함과 함께 방심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승승장구했던 볼트가 무너졌다. 하지만 그가 이번 대회 남자 200m(결선, 9월3일)에서 똑같은 실수를 할 가능성은 낮다. 기록에 집착하지 않을 경우 빠른 스타트를 할 필요가 없다. 이렇다할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마음만 편하게 먹는다면 200m에선 우승할 수 있다. 대구=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