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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육상]김현섭 일으킨 힘 '다섯살 아들와 뱃속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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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섭아! 힘들어도 민재 생각하면서 힘내!"

김현섭(26·삼성전자)은 힘을 냈다. 음료수를 쥐어주던 이상훈 트레이너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민재'라는 이름이 들리는 순간 없던 힘이 솟아났다.

김현섭은 28일 대구 경보코스에서 열린 남자 20㎞ 경보에서 1시간21분17초로 6위를 차지했다. 이번대회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 처음으로 톱10에 들었다. 1993년 슈투트가르트대회 남자 마라톤에서 김재룡이 4위, 1999년 세비야대회 높이뛰기에서 이진택이 6위를 차지한 이후 최고의 성적이다.

김현섭은 중후반 페이스가 약하다. 10㎞가 넘어가면 1㎞코스를 왕복하는 2㎞ 랩타임이 8~9분대로 떨어진다. 이를 7분대까지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이민호 경보대표팀 코치는 강원도 고성에서 김현섭을 강하게 조련했다. 한달간의 합숙훈련동안 중반대 랩타임을 끌어올리는데 중점을 두었다.

힘든 훈련을 이겨내게한 것은 가족 덕택이었다. 김현섭에게는 육상선수 출신이자 동갑내기 아내 신소현씨와 다섯살 아들 민재가 있다. 신씨와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2006년 사랑의 결실을 맺어 민재를 얻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각종 대회 참가와 합숙 훈련으로 차일피일 미뤘다. 11월 26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훈련이 끝나고 숙소로 들어가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때 힘을 주는 것은 아내 신씨와 아들 민재의 목소리였다. 민재의 재롱이 담긴 동영상을 보며 잠에 빠져들었다.

대회를 얼마남겨놓지 않은 23일 고성 합숙훈련을 마치고 수원집에 들렀다. 오랜만에 가족과 만났다.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신씨가 "내년 5월 민재에게 동생이 생긴다"고 했다. 임신이었다. 김현섭은 기뻤다. 아기를 위해 좋은 성적을 약속했다.

14㎞가 넘어서자 김현섭의 페이스는 역시 떨어졌다. 이때까지 1위로 달리고 있던 스즈키 유스케(23·일본)와도 50m가까이 차이났다. 이민호 코치는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훈련을 했건만 다시 중반 페이스가 떨어졌다. 마음속으로 힘을 내라고 소리쳤다. 김현섭의 머리속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 트레이너가 '민재를 생각하라'고 독려한 것도 이때였다. 전날 민재는 아빠에게 "아빠 힘내. 잘해"라고 응원했다. 임신한 아내를 대신해 경기장을 찾은 장인장모 내외의 응원소리도 들렸다.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팀동료 박칠성(29·국군체육부대)과 변영준(27·대구시청)도 머리에 떠올랐다. 김현섭을 위해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처한 고마운 동료들이었다. 다리에 힘을 다시 넣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김현섭은 차례차례 앞에 있던 선수들을 제쳐 나갔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페이스를 유지했다. 코칭스태프들은 "중후반에 페이스가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놀라워했다. 결승점 2㎞를 남기고 체력이 떨어진 스즈키를 제쳤다. 응원나온 시민들은 김현섭의 한걸음한걸음에 큰 박수로 힘을 보탰다.

6번째로 결승선에 들어오던 순간 김현섭은 쓰러졌다. 다리가 풀렸다. 모든 힘을 쥐어짰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굴은 미소로 가득찼다. 메달까지는 아니지만 가족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자부심이었다. 김현섭은 "메이저 대회에서 늘 20~30위권에 머물렀었다. 홈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징크스를 깬 것 같아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바로 또 다른 목표도 설정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이었다. 김현섭은 "내년 런던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하겠다"며 메달 욕심도 드러냈다.

언론 인터뷰를 마친 김현섭은 코칭 스태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누구인지는 얼굴을 보니 알 수 있었다. 통화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남편이자 아버지의 웃음이었다. 대구=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