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고 시절 그는 이천수(오미야)와 함께 고교 최대어였다.
이천수는 고려대행을 선택했고, 그는 프로로 직행했다. 2000년 안양LG(현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 첫 해 K-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탄탄대로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 최종엔트리에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 21세, 팀의 막내였다. 터키와의 3~4위전(2대3 패)에 출격하며 4강 신화의 역사를 함께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잊혀졌다. 팀도 정신없이 옮겨 다녔다. 2004년 인천, 2005년 일본 J-리그 시미즈, 2006년 포항에 이어 2008년 전북에 둥지를 틀었다. 부정적인 시선이 그를 휘감았다. 빛을 잃었다. 그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그 순간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전북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2009년에는 팀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지난해 여름 이적시장에서 7년 만에 친정팀 FC서울에 복귀했다.
최태욱, 어느덧 서른 살이다. 이립, 마음이 확고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또 다시 고난이 찾아왔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팀의 주춧돌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는 지난 연말 친정팀에 10년 만의 K-리그 우승을 다시 선물했다. 개인적으로는 2년 연속 챔피언에 올랐다. '우승 청부사'의 꽃이 만개했다.
그러나 올시즌 개막 직전 부상 암초를 만났다. 수술대에 올랐다. 오른무릎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서울은 한 달 뒤 복귀가 예상된다고 했다. 4월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라운드에 그는 없었다. 팀은 벼랑 끝으로 몰렸다. 황보관 전 감독이 자진 사퇴했다. 그라운드를 함께 누볐던 최용수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았다.
최태욱은 지난달 17일 포항과의 원정경기에서(2대1 승) 비로소 올시즌 데뷔전을 치렀다. "이제 경기에 나가서 도움을 줄 수 있게 됐다. 팀이 상승세를 탈 수 있도록, 또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도록, 서울다운 경기를 보여주겠다." 서울이 기록한 K-리그 최다연승인 6연승의 중심에 섰다.
선발 출전은 아니지만 광주(4대1 승), 전남(1대0 승), 제주(3대0 승)전에 교체 출격했다. 경기가 거듭될 수록 '왜 최태욱인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남전에서 경기종료 직전 터진 몰리나의 극적인 결승골은 최태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약 25m를 폭풍질주 한 후 크로스를 올렸고, 데얀을 거쳐 몰리나에게 연결됐다. 제주전에서는 전반 31분 일찌감치 그라운드를 밟았다. 경기를 읽는 눈이 탁월했다. 쉴새없는 측면 돌파와 크로스로 제주가 혼쭐이 났다. 그의 플레이는 이타적이었다. 결정적인 골 기회에도 패스를 선택했다. 주연 대신 명품 조연이었다. 기록된 공격포인트는 없다. 내용은 다르다. 고참으로 팀을 위해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다.
서울은 최태욱의 컴백 후 3위(승점 39·11승6무5패)로 올라섰다. 2위 포항(승점 40·11승7무4패)과의 승점 차는 단 1점이다. 선두권 싸움이 흥미를 더해가고 있다. "주변 선수들과 잘 어울리고 분위기메이커이자 긍정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존재다. 7개월간의 부상 공백에도 항상 팀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프로 선수란 걸 느꼈다." 최 감독의 평가다.
2003년 12월 동갑내기 정혜령씨와 웨딩마치를 울린 최태욱은 두 아이(1남1녀)의 아빠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서른 즈음에', 그는 축구란 무엇인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