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 라이벌전은 양날의 검이다. 호적수와의 대결에서 패하면 충격은 두배, 세배다. 반대로 승리한다면 단순한 1승 이상의 '플러스 알파'를 챙길 수 있다. 이렇다보니 적잖은 부담이 생긴다.
자연 생태계에서 맹수끼리는 서로 잘 다투지 않는다. 싸우다 다치면 서로 치명상을 입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한데 아시아 최고의 라이벌 매치라는 한-일전은 더 자주 열리고 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한-일전(A매치)은 모두 8차례 밖에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2010년 2월부터 현재까지 1년 반 동안 모두 5차례나 한-일 양국은 격돌했다. 엄청난 빈도다. 한-일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는 대부분 시드를 받기 때문에 만나기 힘들다. 2년마다 열리는 동아시아선수권이나 4년마다 펼쳐지는 아시안컵 정도가 대면 무대다. 잦은 한-일전의 이유는 몇 년전 양국 축구협회 수뇌부가 잠정 합의한 '한-일전 정례화' 때문이다.
서로를 자주 보다보니 한-일전 패러다임도 약간씩 바뀌고 있다. 단순한 혈투 이상을 넘어 서로를 통해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키운다.
자케로니 일본 감독의 생각도 비슷했다. 자케로니 감독은 9일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라이벌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두 팀은 아시아 톱클래스다. 한-일전을 통해 우리가 얻을 것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 캡틴 박주영도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일이 만나면 늘 재미있는 경기를 한다. 우리는 갈길이 멀다. 승부를 떠나 한-일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을 것을 확보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현지에서 기자가 받은 첫번째 충격은 일본의 자신감이었다. 일본 언론은 예년보다는 훨씬 더 자극적으로 한-일전을 다루고 있다. 지난해 5월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출정식을 겸한 평가전에서 한국에 0대2로 완패했던 장면은 1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TV화면에 등장한다. 특히 당시 박지성이 선제골을 넣고 망연자실해 하는 일본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돌던 '산책 세리머니'는 한-일전 하이라이트 단골메뉴가 됐다.
일본 대표팀에 정면대결을 촉구함과 동시에 이제는 한국과 대등하다는 자신감, 나아가 '당연히 한국에 이겼어야 했는데 그때는 졌다. 이제는 양보못한다'는 뉘앙스였다. 일본은 남아공월드컵 16강과 아시안컵 우승으로 1년 넘게 '축구 축제'를 벌이고 있다. 예년에는 한국에 조금이나마 수세적인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대놓고 당당함을 내비친다. 몇 년전만해도 한-일전을 앞두고 한국은 뜨겁고, 일본은 다소 냉정했지만 최근엔 일본도 한-일전 열기에 중독된 듯 하다.
경기력적인 측면에서도 한-일은 서로의 장점을 눈여겨 보고 있다. 한국은 예전에 비해 개인기와 패스가 몰라보게 매끄러워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 잔디구장이 훨씬 더 잘 마련돼 있고, 유소년 유망주의 해외 연수가 더 활발했던 일본이 좀더 앞서 있던 부분이 바로 개인기와 패스였다.
일본 축구는 좀더 다이내믹해졌다. 태클도 과감하고 압박도 심하다. 이는 강한 피지컬을 앞세운 한국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한-일은 서로 물고 뜯는 사이 발전했다. 이제 아시아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한 수 위의 기량을 항상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한-일전을 통해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하고, 기를 쓰고 발전하려 애썼기에 가능했다.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이 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3~4년전만 해도 일본은 베테랑이 팀을 움직였다. 하지만 최근 가가와(22·도르트문트), 우치다(23·살케04) 등 20대 초반의 영건들이 속속 주전자리를 꿰차고 있다. 지속적으로 A대표팀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는 한국에 자극받았음은 자명하다.삿포로=박재호 기자 jh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