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리 없이 태어난 한 아기는 생후 11개월 만에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희망은 절단된 다리와 함께 그를 떠난 듯 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은 두 무릎 만으로도 충분했다. 비장애인인 형과 놀기 위해 어릴때부터 두 발을 바삐 움직였다. 어려서부터 스포츠를 좋아하던 그는 의족을 달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학창시절부터 럭비를 시작으로 테니스와 수구, 레스링 등 각종 운동을 섭렵했다. 하늘은 두 다리 대신 강한 승부욕을 그에게 선물했다. 수구와 테니스에서는 지역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길은 수구도 럭비도 테니스도 아닌 '스프린터'였다. 18세가 되던 2004년 럭비경기를 하다 입은 다리 부상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게 된 것. 재활치료를 하며 즐겼던 육상에 매력을 느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스프린터의 길로 들어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여기까지가 '의족 스프린터' 오스카 피스토리우스(25·남아공)가 육상계에 발을 디딘 사연이다.
시작은 늦었지만 성장속도는 그의 스피드 만큼 빨랐다. 육상입문 첫해, 2004년 아테네페럴림픽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카본 섬유 소재의 'J'모양 의족을 달고 뛰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블레이드 러너'라는 애칭도 생겼다. 2005년 패럴림픽 월드컵에서 100m와 200m를 동시에 석권했고 2006~2007년에는 100m, 200m, 400m 등 단거리 종목에서 장애인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등 스프린터로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장애인이 아니다. 능력을 가졌다면 비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가 밝힌 삶의 모토처럼 능력이 있었다. 비장애인과의 경쟁을 꿈꿨다. 2007년 7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골든 갈라 대회가 비장애인과의 첫 대결. 46초90의 기록으로 조 예선 2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이때부터 그의 꿈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등 더 큰 무대를 향했다.
2008년 1월 베이징올림픽을 준비하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보철 다리로 비장애인 선수들과 경쟁을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며 그의 올림픽 출전을 금지 시킨 것. 하지만 스포츠중재재판소(CAS)가 극적으로 IAAF의 결정을 뒤집으면서 피스토리우스의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길은 다시 열렸다. 비록 베이징올림픽 당시 A기준기록(45초55)에 0.7초가 모자라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베이징 페럴림픽에 참가해 100m 200m 400m를 다시 석권했다. 더이상 장애인 무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베이징올림픽 참가 후 3년간 피스토리우스는 메이저 대회 참가의 꿈을 안고 기록단축에 매진했다. 지난 18일(한국시각) 이탈리아 파두아에서 열린 육상대회 남자 400m에서 46초65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세계선수권 출전 A기준인 45초25에는 1.40초 모자랐다.
그에게 남은 기회는 단 한번. 그런데 지난 수년간의 피나는 노력이 단 한번의 레이스에 모두 쏟아져 나왔다. 20일 이탈리아 리냐노에서 열린 대회 남자 400m에서 45초07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세계선수권 출전 A기준기록(45초25)을 넘어섰다. 종전 개인 최고기록인 45초61을 0.54초나 앞당긴 기적의 드라마였다. 세계선수권대회 한 종목의 A기준기록을 통과한 자국 선수는 최대 3명까지 출전이 가능하다. 현재 남아공 국적의 선수 중 남자 400m A기준기록을 통과한 선수는 피스토리우스를 포함해 2명 뿐이다.
장애를 이겨내려는 한 소년의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다. 그는 세계선수권 A출전기준을 넘어선 직후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꿈같은 레이스였다. 자고 일어나봐야 실감이 날 것 같다. 300건이 넘는 메시지가 오고 있어서 잠도 못잘 지경이다. 그동안 많은 성원을 보내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며 소감을 밝혔다.
"대구에서 보자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린다." 벌써 그의 마음은 대구에 있는 듯 했다. 오는 8월 27일 개막하는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그 덕분에 차별없는 도전의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피스토리우스는 비장애인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경쟁한 최초의 장애인선수로도 역사에 남게 된다. 달구벌을 뜨겁게 달굴 의족 스프린터의 또 다른 도전은 이제 막 시작됐다.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