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감독 박인제)에는 두 차례 판타지 장면이 나온다. 사회부 기자인 주인공 이방우(황정민)의 느린 움직임을 비춘다. 그는 물 속에서 어딘가를 더듬는다. 검고 푸른빛이 도는 벽을 닮았는데, 사실은 고래의 일부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고래 전체의 모습이 드러나고, 인물은 점점 작아지고, 이방우는 마침내 하나의 점이 된다.
이 판타지 장면이 말하려는 의도는 명확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고래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주인공 이방우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어떤 정치적 음모의 진실을 파헤치려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진실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이처럼 비관적이다. 익숙하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하다.
'모비딕'은 강원도 오지에 있는 발암교 폭발 사건과 그 이면에 감춰진 거대 세력의 음모를 고발한다. 1990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을 모티브로 한다. 당시 보안사에서 근무하던 윤 이병은 민간인 사찰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갖고 탈영해 폭로했다. 영화에서는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윤혁(진구)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모비딕'의 홍보 카피는 '대한민국 최초의 음모론'이다. 그러나 한국영화 테두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이 문구는 효력을 잃는다. 유명 정치인의 죽음의 비밀이나 정보기관의 음모를 파헤치는 영화는 많다.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모비딕'은 미스터리 형식으로 진행된다. 오프닝은 조용한 긴장감으로 시작된다. 한적한 도로를 비추는 CCTV 화면을 보여준다. 갑자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다리가 폭파된다. 무슨 일일까. 영화는 사회부 특종 기자들이 폭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을 줄곧 따라간다. 흥미로운 소재와 구성이다.
시나리오는 비교적 꼼꼼하다. 스토리의 기승전결 짜임새도 갖추고 있다. 윤혁의 정체와 그가 비밀을 털어놓게 된 사연, 다리 폭파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실체, 정보기관 배후 인물들의 음모 등을 정리해서 보여준다. 스토리가 헐거운 태작이 유난히 많았던 올 충무로 영화들과 비교하면, 수준급 구성 솜씨를 보여준다. 캐릭터도 눈길을 끈다. 다소 어눌한 듯한 휴머니스트 기자 손진기(김상호)는 이채롭다. 배우 김상호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색다른 재미를 준다.
영화는 엔딩 장면도 흥미롭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음모는 되풀이된다는 점을 넌지시 알려준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이방우에게 던져놓고 간 1만원짜리 지폐는 상징적이다. 돈이 필요했던 지방지 출신 특종기자 손진기의 대사와 맞물린다. 그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정보기관과 모종의 거래를 했을 가능성인데, 이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는 나름대로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그런데 중반 이후 동력이 떨어진다. 강약의 리듬, 구성의 변화가 없어서다. 관객은 사건의 배후를 이미 알고 있다. "검찰총장은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고 말하고, 기자회견 내용까지 지시하는 막강 권력자(정보기관)다. 반면 기자들은 여전히 기본적인 사건 취재에 매달린다. 도청당하고, 사고를 가장한 교통사고로 죽고, 납치돼 폭행당한다. 그러면서 정의를 위해 몸 사리지 않고 취재한다. 익숙한 캐릭터, 낯익은 설정이다. 엇박자다.
게다가 정보기관 권력자와 주변 인물들은 배경으로만 등장한다. 그래서 직접 부딪치는 치열한 갈등이 없다. 긴장감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영화는 전체적으로 단조롭다는 느낌을 준다. 기자의 취재 과정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 폭이 좁아진 것도 아쉽다. 영화의 시대 배경을 1994년으로 설정한 것도 따져볼 대목이다. 남북 분단 상황이나 정치인 사찰 같은 문제는 요즘도 제기되지만, 시간적 거리 때문에 현실감이 떨어지는 점은 어쩔 수 없다. 황정민, 김상호, 진구 등 배우들의 고른 연기력은 영화에 힘을 실어준다. 엔터테인먼트팀 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