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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집필 거절했는데…이 책으로 한 명이라도 팬 늘면 만족"
(서울=연합뉴스) 이대호 기자 = 한국을 대표하는 남자 아이스하키 실업팀 HL 안양의 통산 9번째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파이널 우승이 걸린 경기에는 어김없이 정몽원(69) HL 그룹 회장이 있었다.
HL 안양의 창단 첫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우승 기념 모자를 쓰고, HL 안양 유니폼을 입은 그는 지난 3일 안양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레드이글스 홋카이도(일본)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 율동을 따라 했다.
4일 서울 송파구 잠실 HL 그룹 본사에서 만난 정 회장은 그날 이야기가 나오자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하도 옆 사람들이 열심히 해서 함께 했다"면서 "아내는 '남들 보기에 이상하다'고 말렸지만, 선수와 같은 마음이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다"고 했다.
정 회장은 줄곧 HL 안양 구단주를 맡아오다가 최근 양승준 그룹 전무에게 구단주 자리를 넘겼다.
그러나 정 회장이 '영원한 구단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 회장의 응원과 함께 HL 안양은 3일 열린 파이널 3차전에 이어 5일 4차전도 승리해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안방에서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V9'을 달성했다.
아이스하키 이야기만 나오면 그룹 총수의 체면은 내려놓고 한 사람의 광팬으로 변신하는 정 회장은 한국 아이스하키의 은인이다.
1994년 만도 위니아(현 HL 안양) 아이스하키단을 창단했고, 2013년부터 2021년까지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맡아 한국 남자 대표팀의 톱 디비전(1부 리그) 승격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결성을 이끌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아이스하키인으로는 최초로 2020년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선정돼 2022년 헌액식을 치렀다.
정 회장의 아이스하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은 지난해 12월 서울의 한 고급 호텔에서 개최한 'HL 안양 30주년 기념식'에서 나왔다.
행사가 끝난 뒤 정 회장은 먼저 식장을 떠나는 대신, 아내 홍인화 씨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명씩 선수 손을 잡고 90도로 깍듯하게 인사하며 배웅했다.
정 회장은 "선수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서로가 소중하다는 걸 알게 해주고자 기념행사를 열었다. 평소에도 선수들 애경사를 잘 챙기려고 한다"면서 "우리 선수들 정장 입으니까 멋있죠?"라며 애정을 숨기지 못했다.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가 남긴 것이라고 알려진 '영화광의 3단계'에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 영화평을 쓰는 것, 영화를 만드는 것'이 있다.
정 회장은 '아이스하키를 수도 없이 보고,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하고, 아이스하키 자서전을 집필함'으로써 '아이스하키광 3단계'를 완성했다.
다음은 30년 빙판 인생을 담은 에세이 '한국도 아이스하키 합니다'를 최근 펴낸 정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자서전을 써 보라는 주변 권유를 거절했다고 들었다. 마음을 바꾼 계기가 있다면.
▲ 처음에는 '이걸 왜 쓰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아이스하키와 연을 맺은 지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비인기 종목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이 좋은 종목을 다 같이 재미있게 즐겨보자고 생각했다. 대중화를 위해서 더 친밀하게, 쉽게 썼다. 이 책으로 한 명이라도 아이스하키 팬이 새로 생긴다면 만족할 것 같다. 그리고 한국 아이스하키를 돌아보면 승리와 패배 속에서 얻은 교훈이 많다. 교훈을 한 번 정리할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 책 서두에 보면 2022년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명예의 전당 헌액을 위해 핀란드로 갈 때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한 '한국도 아이스하키 하나요?'라는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대목이 있다.
▲ 핀란드는 아이스하키 인기가 뜨거운 곳이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선수를 보내기 위해 핀란드 팀을 인수하기도 했다. 핀란드 항공사인 핀에어를 타고 갔는데, 승무원이 저 말을 하더라. 그 말이 계속 맴돌더라. '우리는 죽어라 했는데, 여기서는 안 알아주는구나' 싶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 덕분에 '한국도 아이스하키 합니다'라는 제목이 나왔다.
-- 처음 우리나라가 아이스하키를 시작했을 때 캐나다 피자 배달부와 소방관 팀에 패했던 이야기도 책에 있다.
▲ 1990년대 중반 캐나다 벨빌이라는 도시에 한국 남자 대표팀이 훈련하러 갔다. 어떤 팀과 연습 경기할지 수배했는데, 붙어 보자고 온 게 피자 배달부와 소방관 팀이었다. 기대를 걸고 붙었는데 첫판에서 졌다. 우리나라는 그때까지 체킹(몸싸움)도 잘 안 했는데 캐나다 선수들은 막 붙더라. 우리가 지니까 그들이 '한국 대표팀 맞냐?'고 물어봐서 부끄러웠다. 옛날에는 그 정도로 약했다.
-- 올 시즌 HL 안양은 이총민, 신상훈 등 최고 수준의 선수가 팀을 떠났다. HL 안양 성적만 놓고 본다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 두려움도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HL 안양이 잘하더라. 이제까지 못 뛰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고, 내부 경쟁도 필요하다. 결국 한국 아이스하키가 인기를 얻으려면 관심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수 선수는 해외에 나가야 한다. 수준 높은 리그에서 경험을 쌓아야 발전이 있다. 앞으로도 나가겠다는 선수가 나오면 다 내보낼 거다. 과감하게 도전하고, 성공하고 돌아오면 좋겠다. 중간에 돌아오면 미워요.(웃음)
-- 그렇다면 한국 아이스하키가 아직 비인기 종목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 요즘은 당구와 비교해보게 되더라. 일단 당구는 인프라가 좋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회(서울고)에서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 당구 한 게임 쳤다. 그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스하키는 따로 시설이 있어야 하고, 접근하기 쉽지 않다. 결국 아이스하키는 다른 방식으로 관심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해외 진출을 장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한국 아이스하키 남자 대표팀은 지난해 3부 리그로 강등됐다. 협회를 이끌던 2017년 톱 디비전까지 올라갔던 걸 떠올리면 아쉬우실 것 같다.
▲ 현실을 보면 이해는 간다. 그때는 귀화 선수가 7명이나 있었고,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한 방향으로 전진했다. 지금은 귀화 선수도 없고, 올림픽도 없다. 대신 아이스하키인들이 단결해서 하나씩 플랜을 세워서 해나가면 된다. 내가 자주 하는 말 중에 '거인의 어깨 위에서 출발해야지, 발바닥에서 출발하면 너무 힘들다'가 있다. 강한 팀들과 붙어야 실력이 자란다.
-- 최근 유소년 사이에서 아이스하키 인구가 크게 늘었다. 링크를 대관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할 정도다.
▲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면 그래도 올림픽 유산으로 '하키 키즈'가 늘어난 것은 큰 소득이다. 이런 저변이 생긴 게 가장 고맙다. 다만 이들이 스틱을 놓지 않도록 대학팀이나 성인팀이 생겨야 한다.
-- 2018 평창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이야기를 해 보자. 그 당시 인원 구성부터 쉽지 않았다.
▲ 선수 구성이 어려웠다. 처음 북측에서는 단일팀이니까 (22인 엔트리 절반인) 11명씩 선수를 보내자고 했다. 북한 선수들이 우리보다 잘하면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이미 3년 동안 한 팀으로 준비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새러 머리 당시 여자 대표팀 감독에게 물어보니 '딱 3명 필요하다'고 북측 선수 이름까지 정해주더라. 인원을 놓고 우리와 북측이 줄다리기 협상을 벌였다. 결국 북측이 선수 12명을 보내더니 '경기마다 3명씩만 내보내라'고 했다.
-- 단일팀과 식사 자리에서 직접 '만남' 노래를 부른 것도 인상 깊었다.
▲ 처음 단일팀은 서먹서먹했다. 진천 선수촌에서도 저들끼리 앉다가 나중에 금방 어울리더라. 올림픽에서 경기는 못 이겼지만, 역사적인 골도 넣고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북측 선수들이 돌아가기 전에 진천 선수촌 인근 식당을 통째로 빌려서 함께 식사했다. 우리 쪽에서 고생한 통일부, 외교부, 국정원 직원과 북측 보위부 직원까지 전부 초대했다. 참 힘들게 준비했지만, 헤어질 때가 되니까 뭉클하더라. 그 아쉬움을 담아 '만남'이라는 노래를 부른 기억이 난다.
-- 북측 선수들이 장비 없이 빈손으로 와서 당황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 장비를 구한다고 애썼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 업체들이 (아이스하키 장비를) 못 보내주겠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아이스하키 장비는 길들이는 데 시간이 걸린다. 새 물건을 받아서 발도 아프고 힘들 텐데도 북측 선수들이 너무 좋아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결국 (대북 제재 때문에) 올림픽 끝나고 장비들을 못 가지고 올라갔다.
-- HL 그룹은 자율주행 시험 차량을 하키(Hockey), 순찰 로봇을 골리(Goalie)라고 이름 붙일 정도다. 경영자로서 아이스하키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 스피드다. 요즘은 예측 불허 시대다.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고객 대응과 제품 개발, 의사 결정까지 빨리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빨리빨리'가 단점도 있지만, 기업에서는 중요하다. 미리 문제점을 파악해서 빨리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스하키만큼 스피드가 중요한 종목이 또 없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우리 기업도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런 스토리를 아이스하키에서 배웠다.
4bun@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