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푸른 남해 품은 명산 명찰…용문사, 보리암, 금산

기사입력 2025-02-26 08:07

보리암에서 바라본 다도해[사진/백승렬 기자]
탐관오리를 밟고 있는 용문사 사천왕[사진/백승렬 기자]
용문사 대웅전의 용 목조 조각[사진/백승렬 기자]
호구산 정상[사진/백승렬 기자]
서포문학공원[사진/백승렬 기자]
금산 정상과 봉수대[사진/백승렬 기자]
보리암 해수관음상과 기암괴석[사진/백승렬 기자]
쌍홍문에서 내다본 남해[사진/백승렬 기자]
금산과 남해[사진/백승렬 기자]
을사년 결의를 다지는 발길 이어져

(남해=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비가 오려 하는지 하늘은 낮게 가라앉았는데 / 산사는 아득히 석문 서쪽에 자리했네 / 스님을 찾아 점점 영원 깊이 들어가니 / 골짜기 따라 안개가 가득해 한줄기 길이 아련하네.

경남 남해군 용문사 일주문 옆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진 촌은 유희경(1545~1636) 선생의 시 '용문사'이다.

500여년 전부터 '꽃밭' '꽃섬'으로 불렸던 남해군.

용문사는 남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절이다.

촌은의 시처럼 겨울비 내린 뒤 희미해진 골짜기에 용문사는 고요히 앉아 있었다.

◇ 남해군 최고·최대 절집…용문사

용문사의 관문인 천왕각은 특별하다.

악귀를 발로 짓누르고 있는 대개의 절집 사천왕들과 달리 이곳 사천왕이 밟고 있는 것은 고위 관리와 탐관오리들이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민초의 곁을 지키고자 했던 용문사의 참모습을 상징한다.

용문사는 '수국사'(나라를 지킨 사찰)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용문사 스님들은 승병을 지휘했던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국난 극복에 힘을 보탰다.

조선 숙종은 이를 기려 용문사를 수국사로 지정하고 보호했다. 왜와 싸울 때 사용했던 대포와 깃발,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수국사 금패가 지금까지 보관돼 있다.

또한 용문사는 '3대 지장 도량'이다.

지옥에 있는 중생까지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에게 망자의 극락왕생을 의탁하는 것을 지장 신앙이라 한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철원 심원사가 용문사와 함께 3대 지장 도량이다.

용문사에는 높이 10m, 무게 100여t으로, 국내 최대 크기인 지장보살좌상이 평화롭고 다사로운 남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남해 금산에 지은 보광사가 전신인 용문사는 천년고찰답게 귀한 문화재들을 품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66년에 지어진 대웅전은 나라의 보물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을 화려하게 장엄한 용, 물고기, 게, 해초, 파도 조각과 문양이 눈길을 끈다. 용이 사는 바다를 떠올리는 장식이었다.

용문사 대웅전은 지장보살이 망자를 태우고 극락으로 안내해가는 '지혜의 배' 반야용선에 비유된다.

건륭 34년(1769) 전남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불화승 쾌윤이 수화승으로 참여한 괘불탱도 보물이다.

괘불은 야외 법회에 사용되는 대형 불화이다.

석조보살좌상은 안정감 있는 신체 비율과 천의를 입은 모습 등으로 미뤄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느 큰 사찰과 마찬가지로 용문사에서도 사찰체험(템플스테이)을 할 수 있다.

초·중학생은 부모와 함께 템플스테이에 무료로 참가할 수 있다는 플래카드가 방문자를 반기고 있었다.

용문사는 호랑이가 누운 형상이라는 호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용문사와 호구산 일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그만큼 정취가 있고 풍광이 맑다.

호구산 전망대봉에 오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유배돼 살았던 노도가 지척이었다.

조선의 문신으로,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서포집' '고시선' 등 소설과 문집을 남긴 김만중은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했던 선각자였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과 같다"고 설파했다.

'구운몽' '사씨남정기'는 전문 한글 소설이다. 용문사 앞에 서포 문학공원이 있다.

남해가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은 바래길 263㎞는 도보여행 길이다.

이동면 용소폭포 마을바래길이 용문사와 미국마을, 용소폭포를 잇는다.

◇ 간절한 걸음걸음이 머무는 보리암

눈이 흔치 않은 남해에 가는 눈발이 날리던 을사년 벽두. '3대 관음 도량'으로 꼽히는 남해 보리암에는 불자와 탐방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새해에는 소원을 이루겠다는 결기가 어린 힘찬 발걸음이었다.

자비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을 믿는 신앙을 불교에서 관음신앙이라고 한다.

보리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가 3대 관음 도량이다.

모든 소원은 아니더라도 그중 하나는 들어준다고 이름난 기도처가 보리암이다.

원효는 신라 신문왕 때(683)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산의 이름을 보광산, 암자의 이름을 보광사라 지었다.

원효는 보광사를 현재의 용문사 자리로 옮겼으며, 조선 시대에 옛 보광사의 이름은 보리암으로 바뀌었다.

'보리'는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준다는 뜻이다.


보리암의 '기도발'은 역사적으로 '입증'됐다.

보리암에서 100m쯤 걸어 내려가면 '조선태조기단'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 백일기도 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성계는 기도하면서 임금이 되게 해주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소원대로 건국에 성공한 태조는 산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었다.

산을 실제 비단으로 덮지는 못했지만 '비단 금'자를 쓴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다.

서재심 남해군 문화관광 해설사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큰 소원을 이루어주었는데 서민들의 작은 소원을 안 들어주겠느냐"며 웃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한 보리암은 다도해를 앞마당으로 삼고 있었다.

암자 뒤로는 대장봉, 농주암, 화엄봉, 일월봉, 제석봉, 상사암 등 기암괴석들이 성소를 보호하는 듯 도열해 있었다.

웅장하고 청정한 자연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힘을 가졌다. 순수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큰 것 아닐까.

◇ 남녘 바다에 솟은 비단산

보리암의 명성은 비단을 두른 듯 아름다운 금산(681m)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듯하다.

기기묘묘한 암봉과 아찔한 절벽, 넓고 푸른 바다, 올망졸망한 섬들이 어우러진 경관은 탄성을 자아낸다.

금산에는 38개의 명소가 있었다. 제일 높은 봉우리인 망대가 '금산 제1경'이다.

이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 맑은 날에는 금산의 38개 경승지와 이를 에워싼 만경창파를 한 눈으로 굽어볼 수 있다.

망대에는 고려 시대부터 사용했던 봉수대가 남아 있다.

'금산 제15경'인 쌍홍문은 거대한 암벽에 두 개의 둥글고 큰 구멍이 나란히 있는 돌문이다.

쌍홍문을 보지 않고는 금산을 다녀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소이다.

금산 38경 중 세존도, 노인성, 일출은 '금산에 없는' 장관이다.

세존도는 금산에서 조망할 수 있는 무인도이다. 석가세존이 돌배를 타고 이 섬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노인성은 춘분, 추분 전후에 금산에서 잘 보이는 별이다.

다른 시기, 장소에서는 이 별을 잘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별을 보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금산의 일출 또한 장관이어서 새해 첫날 금산 정상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조선 숙종 때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남구만은 남해에서 유배살이하던 중 지은 시 '금산에 올라'에서 '산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으니 / 진경에 당도하여 시정마저 잃겠구나 / … / 산정에는 염주를 꿰맨 듯 기암괴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렸구나'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구만의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를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었느냐 / 고개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도 남해 유배 중에 지은 것으로 남해군은 추정한다.

금산의 경이 중에는 시쳇말로 '글로벌'한 것도 있다.

'금산 제34경'인 부소암에는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귀양살이하고 갔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옛이야기는 이렇게 엮인다. 진시황의 장남이자 똑똑한 부소는 어리숙한 차남 호혜를 옹립하려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아 동쪽으로 떠나는 서불의 배에 몰래 탄 부소는 금산에 닿았을 때 내려 부소암에서 숨어 지냈다.

인근 부산, 광양, 여수 등으로 가기 위해 국제항로를 이용하는 대형 상선들이 금산 앞바다에 두둥실 떠 있었다. 임시 정박이다.

좀 있으면 남해와 여수를 잇는 해저터널이 뚫려 남해 해저터널 시대가 열린다.

남해는 군 전체가 관광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랭이 마을, 독일마을 등 개성적인 관광 자원이 많다.

금산과 보리암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명승지이다.

K 팝, 영화, 소설에 이어 한국의 자연에 매료된 세계인들이 절경에 취해 금산 구석구석을 누비는 것도 머지않아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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