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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 영월의 수줍음 "다음에 만날 땐 예쁜 꽃을 피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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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앉아 눈앞의 풍경에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어느덧 가을이다. 어찌할 수 없는 더위에 지쳐 잔뜩 날이 섰던 감정은 아침·저녁 쌀쌀해진 바람에 하염없이 몽글몽글해진다.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다. 사람이 변하는 건 순식간이라더니, 날씨가 변하고 풍경이 바뀌는 속도는 허무할 만큼 빠르다. 가을이 되면 낭만을 찾아 떠나고 싶지만, 바쁜 일상에 마땅히 할 게 없어 오는 허무함은 감정 기복을 키우기 마련이다. 매년 맞는 계절이지만, 또 매번 낯선 가을과 직접 마주하기 위해 떠났다. 가을을 닮은 그곳, 영월이다. 슬픈 이야기, 아름다운 풍경으로 들어가다보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진짜 가을 감성이 내 몸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다음에 만날 땐 예쁜 곳을 피우고 있을 것이란 속삭임도 바람을 타고 귓가를 맴돈다.

▶세월이 만들어 낸 돌개구멍 '요선암'

영월의 무릉도원면은 여름에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무릉도원면의 백미는 무릉리의 요선암이다.

요선암은 태기산에서 발원해 영월군 무릉도원면으로 들어와 흐르는 주천강과 사자산에서 발원한 법흥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갖가지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을 말한다. 요선암의 바위는 2013년 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이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돌개구멍은 지리학 용어로는 포트홀이라고 하는데, 강바닥의 바위에 항아리나 원통 모양으로 난 구멍을 말한다.

조선 명종 때 봉래 양사언이 평창군수로 재직할 때 이곳에 와서 바위 위에 '요선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맑은 강 속에 커다란 바위들이 넓게 깔려 있어 경치가 뛰어나다.

과거 요선암이 있는 지역은 워낙 벽지에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도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요선암이 있는 지역을 지나가는 관리들 가운데는 요선암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치인 김귀주의 '가암유고'에는 1767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강원도 일대를 순시하면서 요선암의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싶어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흐르는 물소리와 신선놀이에 흠뻑 '요선정'

오랜 세월 아는 사람들만 즐겼다는 요선암의 풍경을 제대로 즐기고 싶어 요선암으로 향했다. 요선암은 무릉리 주천강 강변에 있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자다. 요선정은 1913년 요선계 계원들이 지은 것으로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요선계는 과거 무릉리에 거주하던 원주이씨, 원주원씨, 청주곽씨 세 성씨의 대표들이 요선암에 모여서 조직한 동계(마을 삼들이 만든 계)다. 요선계가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744년에 작성된 기록에 의하면 1695년에 화재로 요선계의 창고와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기구들이 불에 탔고, 1743년에 화재로 여러 가지 문서들이 타 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요선계가 만들어진 건 적어도 1695년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품은 요선정의 좌우로는 오래된 마애불과 석탑이 있다. 지역 주민들은 석탑인근은 과거 신라 때의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 홀로 지낸 긴 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곳이었다. 강의 지류인 서강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마치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이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가 있다.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수 백년생의 거송들이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는데,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은 단종이 걸터앉아 말벗을 삼았다고 해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관음송은 수령 600여 년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다.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2008년 12월 26일 명승으로 지정됐으며, 청령포를 가기 위해선 지금도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한다.

▶이야기에 빠지고, 풍경에 취하고 '장릉'

장릉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으로,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있는 게 특징이다.

장릉은 기존 왕릉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도 단출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정자 등이 있다.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단종 역사관에는 단종의 탄생부터 17세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대기를 기록한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창덕궁을 지나 강원도 영월에 이르기까지 단종의 유배 경로를 표시해둔 사진을 통해 단종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단종 역사관을 나와서 길을 따라 걸으면 단종능으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김세형 기자 fax123@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