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류동혁 기자] 한국 양궁이 전종목 석권이라는 '파리 신화'를 이뤄냈다. 올림픽에 걸려있는 5개 종목을 모두 금빛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한국 양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하다. 바로 4년 뒤 LA올림픽 얘기를 한다.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고 했다.
한국 양궁 수장이자 현대차그룹 회장 정의선 대한양궁협회 회장에게 들어온 질문이다. 정 회장은 5일 "전략회의를 하고, 여러 가지 장단점을 분석해서 준비하겠다"고 했다.
짧지만 매우 강렬한 말이다. 질문이 성급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세계최강 한국 양궁은 항상 그랬다. 3년 전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양궁은 남자 개인전을 제외, 5개 종목 중 4종목을 우승했다. 당시에도 목표를 120% 달성했다.
준비 과정을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무려 4년간 빈틈 없이 준비했기 때문이다. 격전장이 될 양궁장과 똑같은 형태의 양궁장을 매 대회 자체 제작해 시뮬레이션 훈련을 실시한다. 도쿄올림픽 때는 '리얼 도쿄'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유메노시마 양궁장을 진천선수촌에 그대로 옮겨놨다. 결국, 금메달 4개를 따냈다. 그러나, 한국 양궁은 다음 스테이지를 담담하게 이어갔다. 3년 뒤 열릴 파리올림픽 준비에 곧바로 돌입했다. '리얼 파리'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파리 앵발리드 경기장을 진천선수촌에 그대로 재현했다.
장영술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은 "회장님께서 항상 올림픽이 끝나면 바로 4년을 준비해왔다. 이곳 앵발리드 경기장은 전쟁기념관이다. 지난해 정몽구배 대회를 전쟁기념관에서 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센강 인근의 바람을 대비,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거의 비슷한 남한강 특별 프로그램을 추가했다. 관중의 소음 등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그대로 재현했다. 준비 가능한 모든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게다가, 이번 대회에서는 '개인 훈련용 슈팅 로봇'까지 지원,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번 대회 전종목 석권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남녀 개인전, 혼성단체전, 남녀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쓸어담았다. 특히, 마지막 남자 개인전에서는 에이스 김우진(청주시청)이 미국의 베테랑 엘리슨과 슛오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승리했다. 5세트에서 두 선수 모두 30점 만점. 그리고 슛오프에서 둘다 모두 10점을 쐈지만, 과녁 정중앙에 김우진의 화살이 4.9㎜더 가까웠다.
4일 한국 양궁은 세계 최강에서 신화의 영역에 진입했다. 하지만, 더욱 믿음직한 것은 한국 양궁인들의 마음가짐이다. 수장인 정 회장부터 에이스 김우진까지 빈틈이 없다. 김우진은 개인전 금메달로 3관왕을 확정지은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내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몇 개나 따든 양궁에서 해야 하는 운동은 똑같다. 아직 선수 은퇴는 없다. LA올림픽을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양궁의 시스템은 매우 견고하다. 국가대표 선수들 뿐만 아니라 중, 고교 선수들을 육성하는 시스템이 잘 꾸려져 있다. 김제덕 임시현 등 파리올림픽에서 맹활약했던 한국 양궁의 간판이 모두 이 시스템 속에서 쭉쭉 성장해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한국이 전종목을 석권했지만,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고, 세계적 강자들은 한국 선수들에게 계속 설욕을 벼르고 있다. 때문에 한국 양궁의 강력함은 언제든지 거센 도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수많은 한국 지도자들이 경쟁국의 사령탑으로 나가 기술과 노하우를 전파하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해 12월 대한민국 양궁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공정하게 경쟁했는데,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품격과 여유를 잃지 않는 진정한 1인자의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딱 맞는 말이다. 세계 최고 수준 선수들의 치열한 내부 경쟁, 4년 간의 철저한 준비, 현대자동차그룹의 효율적이면서도 전폭적 지지가 삼박자를 갖추고 있는 한국 양궁이다. 이 상황에서도 세계정상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마음가짐'이 세계정상, 더 나아가 신화를 만들 수 있는 가장 핵심 원동력이다. 류동혁 기자 sfryu@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