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영록 기자] "폰푼은 V리그 최고의 세터다. 고민할 것도 없다."
배구는 '세터놀음'이라고 한다. 팀의 척추 역할을 하는 핵심 포지션이다.
선수단 전반에 걸친 의사소통, 그리고 공격수별로 맞는 토스를 올려줄 수 있어야한다. 코트 전방위를 커버하는 스피드와 볼을 다루는 스킬도 필요하다. 구하기도, 대체하기도 가장 어려운 포지션이다.
올시즌을 앞두고 김호철 IBK기업은행 감독은 아시아쿼터 드래프트에서 태국 세터 폰푼을 뽑았다.
국제대회에서 수차례 한국 대표팀을 완파하며 검증된 아시아 최고의 세터다. 하지만 빠른 배구에 익숙한 그가 V리그에 쉽게 적응할지 의문도 있었다. 아시안게임 일정상 시즌 개막 직전까지 호흡을 맞출 시간이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였다.
메가(정관장)나 위파위(현대건설)를 추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김호철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레전드 세터답게 욕심도 많고, V리그에 맞게 다듬어낼 자신도 있었다.
시즌초에는 고전했다. 손발이 안 맞는 모습이 수시로 연출됐다. 답답해하는 폰푼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1라운드 성적은 2승4패. 하위권의 도로공사와 페퍼저축은행만 이겼다. 2라운드에는 3승3패로 한발짝 전진했다. 정관장이 추가됐다.
3라운드에는 완연한 강팀으로 거듭났다. 풀세트 접전 끝에 흥국생명에게 아쉬운 역전패를 당했지만, 나머지 5개팀에 모두 승리를 거두며 5승1패를 기록했다.
폰푼 이전에도 한국 배구가 세계적인 외국인 세터를 영입한 적이 있다. 2009~2010시즌 남자부 우리캐피탈에서 뛴 세르비아 출신 블라도 페트코비치다. 1m98 큰키에 총알같은 토스의 소유자였다. 성균관대 시절 방지섭, 진창욱 등 장신 세터를 길러낸 김남성 당시 우리캐피탈 감독의 과감한 선택.
결과는 실패. 토종 선수들에 대한 블라도의 불신은 커져만 갔고, 가빈 슈미트(당시 삼성화재)를 비롯해 2m를 넘나드는 타팀 장신 공격수들에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시즌 도중 퇴출, 우리캐피탈은 봄배구에 실패했다.
폰푼은 블라도 이후 14년만에 한국 배구에서 뛰는 외국인 주전 세터다. 시즌초 만난 김호철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블라도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는 "조만간 적응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당시 우리캐피탈에서 블라도와 '찰떡 궁합'을 보여준 공격수는 안준찬이었다. '하나둘셋'이 아닌 '하나둘'에 점프하는 능력을 갖춘 선수로 유명했다. 그 또한 지금 김호철 감독 휘하에 코치진으로 몸담고 있다.
주포 아베크롬비를 비롯해 표승주, 황민경 등 주요 공격수들과 폰푼의 호흡은 이제 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23일 현대건설전 승리후 만난 김호철 감독은 "아직 호흡이 완벽하지 않다. 폰푼이 종종 답답해할 때가 있다. 그럴땐 볼이 자제력을 잃고 춤을 춘다"면서 "아직 더 잘할 여지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배구계에서는 "7개팀 모두 1순위 나오면 폰푼이었다"며 '예고된 성공'이라는 반응이다. 하지만 선수 시절부터 유럽을 넘나들며 세계배구가 익숙한 김호철 감독이라서 가능했다는 호평도 적지 않다.
김연경 이후 세계 무대를 바라보는 한국 배구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시선도 있다. V리그는 한때 갈라파고스로 불렸다. 해외에서 슈퍼스타로 활약하던 외국인 선수가 리시브에서 해방돼 공격에만 집중하는, 'V리그 최적화' 선수에게 짓눌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젠 남녀모두 외국인 사령탑이 잇따라 영입됐고, 외국인 선수의 활용도도 넓어졌다. V리그에서 5시즌째 활약중인 타이스(한국전력)는 "과거에는 외국인 선수에게 매경기 40~50득점을 요구했다. 요즘은 확실히 다르다. 한국 배구가 진화했다"는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2021~2022시즌 도중 '항명 파동'이 터지며 만신창이가 됐던 기업은행. '소방수'로 부임한 김호철 감독은 어느덧 팀을 건강하게 탈바꿈시켰다.
이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폰푼이 V리그에 잘 적응한다면 우승후보'라던 시즌전 예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폰푼과 함께 어디까지 갈수 있을까.
김영록 기자 lunarfly@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