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권인하 기자]"징크스를 깬 것 같지는 않다."
두산 베어스에 '정가을'로 불리는 선수가 있다. 바로 정수빈. 포스트시즌에 좋은 활약을 펼쳐서 붙여진 별명이다.
LG 트윈스에도 그런 선수가 생겼다. 바로 왼손 투수 김윤식이다. 후반기에 잘한다. 지난해 8승5패 평균자책점 3.31을 기록했는데 후반기에 5승2패 평균자책점 2.68로 국내 에이스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첫 포스트시즌 등판에서도 호투를 하며 빅 게임 피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플레이오프 3차전서 키움 히어로즈 에이스 안우진과 선발 맞대결을 펼쳐 5⅔이닝 동안 3안타 무4사구 3탈삼진 1실점의 호투를 펼치며 강한 인상을 심은 것.
지난해의 활약을 바탕으로 선발 자리를 꿰찬 김윤식은 WBC 대표팀에도 선발되면서 점차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면서 김윤식은 자신의 욕심을 드러냈다. 올시즌을 앞두고 등번호를 바꾼 것. 입단하며 57번을 달았던 김윤식은 이번에 47번을 구단에 요청했다. 47번은 LG의 유일한 20승 투수인 이상훈 해설위원이 달았던 번호다. LG의 왼손 에이스의 상징과도 같은 번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저주의 번호'이기도 했다. 이상훈 이후 이후 서승화 조윤준 봉중근 등 왼손 투수들이 47번을 달았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 이 위원이 LG 코치로 돌아왔을 때 "47번은 저주받은 번호"라면서 스스로 그 번호를 달기도 했었다. 이 위원 이후 47번을 단 선수는 없었다.
광주진흥고를 졸업하고 2020년 2차 1라운드 3순위로 LG 입단한 김윤식은 처음부터 47번을 달고 싶었지만 구단에서는 신인이 47번을 달기엔 이르기에 57번을 김윤식에게 내줬다. 그리고 김윤식은 입단 4년차인 올시즌 드디어 47번을 등에 붙이고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저주의 번호' 때문일까. 김윤식의 초반은 좋지 않았다. WBC에서 이렇다할 피칭을 하지 못했고, 돌아와서도 시즌 초반 들쭉날쭉한 피칭이 계속됐다. 구속이 오르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주무기인 체인지업의 날카로움도 없었다. 6월 8일 키움전서 5이닝 12안타 7실점의 부진으로 패전투수가 되자 두 달을 지켜본 염경엽 감독이 결단을 내려 2군으로 내려보냈다. 11경기 3승4패 평균자책점 5.29. 염 감독은 김윤식에게 2군에서 몸만들기부터 다시 하도록 했다. 당장 올라오는게 아니라 확실하게 만들어서 후반기에 돌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염 감독의 판단은 옳았다.
후반기 돌아온 김윤식은 달라졌다. 9월 2일 한화전에 복귀전을 치른 김윤식은 5이닝 6안타 1실점으로 합격. 다음 9월 8일 KIA전에선 5⅔이닝 7안타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고, 15일 한화전서 5이닝 4안타 3실점으로 승리를 추가했다. 9월 27일 KT전서 5이닝 2안타 무실점으로 또 한번 승리투수. 후반기에 돌아와서는 6경기(5번 선발)에 등판해 3승무패 평균자책점 2.13으로 안정감을 보였다. 구속이 기대만큼 오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안정감을 찾았다. 한국시리즈 4선발로 낙점된 김윤식은 '빅 게임 피처'임을 증명했다. 11월 11일 수원 KT위즈파크에서 열린 KT 위즈와의 한국시리즈 4차전서 선발등판해 5⅔이닝 동안 3안타 1볼넷 3탈삼진 1실점의 호투로 승리투수가 되며 데일리 MVP로 뽑혔다. LG의 이번 한국시리즈 선발 투수의 첫 승리였다.
47번을 달고 왼손 에이스의 계보를 이을 수 있는 투수임을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김윤식에겐 아직 47번을 달기엔 모자랐나보다. 김윤식은 지난 2일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2023 러브 기빙 페스티벌 위드 챔피언십'(LOVE Giving Festival with Championship) 에서 '엘린이'팬이 "47번의 저주를 깨신거 같은데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솔직히 말하면 징크스를 깬거 같지는 않다"라고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김윤식은 "가을에만 야구 잘한다는 수식어가 있는데 솔직히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매년 가을에만 잘하면 존경하는 이상훈 선배님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며 "내년시즌 시작할 때는 가을이라고 생각하고 하겠다"라고 말했다. 내년시즌엔 풀타임을 제대로 소화하는 선발 투수가 될 수 있을까. '47번의 저주'가 더이상 생각나지 않을 2024시즌이 될지 궁금해진다. 권인하 기자 indy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