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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영화상] "韓영화 위기, 그럼에도 극장 찾게 만든 힘"…청룡영화상 심사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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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극장을 찾아가게끔 만들어 준 한국 영화"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다.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한 숨 고르기 중인 한국 영화가 새로운 얼굴,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기술력으로 돌파구를 모색, 관객의 마음을 다시 돌려세우고 있다.

제44회 청룡영화상은 지난 24일 성대하게 개최됐다. 올해 청룡영화상은 2022년 10월 7일부터 2023년 10월 11일까지 국내 개봉 및 공개(OTT)된 한국 영화를 대상으로 총 16편의 한국 영화, 10명의 감독, 30명의 배우가 18개의 부문 후보에 올라 각축을 벌였다. 뛰어난 작품성과 유려한 연출력, 눈부신 열연을 펼친 작품과 감독, 배우들이 청룡영화상 아래 집결했고 치열한 경합 끝에 올해 최고의 영화인이 탄생했다.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로 매회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국내 최고의 권위의 청룡영화상은 8명의 심사위원과 네티즌 투표 결과를 종합한 총 9표 중 과반수 득표수를 받은 후보를 수상작(자)으로 선정한다. 전문성과 대중성을 두루 평가하며 모든 작품, 배우에게 공평한 심사를 내리기 위한 방식이다. 후보에 오른 모든 작품을 연출, 제작, 투자, 평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꼼꼼하게 평가, 면밀한 심사를 거쳐 올해 최고의 작품과 배우를 선정했다.

올해 심사 역시 시상식 당일인 지난 24일 오후 1시부터 시작해 약 4시간의 심사위원 격론 끝에 영광의 수상자가 탄생했다. 8명의 심사위원은 심사 결과 유출을 사전에 막기 위해 휴대전화를 반납하고 열띤 토론으로 작품과 연기를 평가하며 올해를 빛낸 영광의 수상작(자)을 선정했다.

▶ 맵다 매워, 신인상

올해 청룡영화상 신인상은 신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준급 실력을 보인 후보자들이 대거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첫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낸 것은 물론 관객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뛰어난 스타성까지 두루 갖춘 미래의 스타들이 쏟아졌다. 그 결과 올해 청룡영화상은 신인남우상으로 '화란'의 홍사빈, '밀수'의 고민시, '올빼미'의 안태진 감독을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선정했다.

먼저 신인남우상을 수상한 '화란'의 홍사빈은 심사위원으로부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라는 호평을 끌어냈다. 개성 있는 외모에서 나오는 신선함이 관객의 눈에 확실히 각인됐다는 평이 이어졌다. 물론 연기적인 성과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어두운 누아르 액션 장르인 '화란'은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캐릭터를 홍사빈만의 디테일하고 섬세한 열연으로 보는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다는 것. 무엇보다 심사위원들은 홍사빈의 '다음'에 대한 기대치를 높게 샀다. 홍사빈과 2차전까지 접전을 이어가며 각축을 벌인 경쟁자는 김선호였다. 심사위원들로부터 홍사빈 못지않은 지지를 받은 김선호는 "그동안 드라마 중심 필모그래피를 쌓았던 배우였지만 스크린 연기에 도전하면서 드라마와 또 다른 매력을 각인시켰다"라는 평가가 이어졌지만 흔들린 '귀공자'의 연출 방향으로 후반부 빛을 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5인 5색 캐릭터가 모두 뛰어났던 신인여우상은 '밀수'의 고민시와 '다음 소희'의 김시은, '화란'의 김형서까지 3파전이 펼쳐졌다. 심사위원은 '밀수'의 고민시에 "고춧가루처럼 매콤한 매력을 선사했다"고 평했다. 통통 튀는 모습으로 대선배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확실하게 드러낸 고민시에 강렬한 인상을 가졌다는 후문. '밀수'의 고민시는 비주얼부터 연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잔상을 남긴 배우로 심사위원의 많은 지지를 받으며 신인여우상의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아쉽게 신인여우상을 놓친 '다음 소희'의 김시은도 심사위원의 호평이 상당했다. 감성 노동의 무게를 10대의 시선으로 잘 풀어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화란'의 김형서는 가수 출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내공의 연기력을 보였지만 분량적으로 아쉬움이 컸다.

신인 배우들뿐만이 아니다. 올해는 신인감독상을 둘러싼 치열한 경합도 만만치 않았다. 올해 신인감독상은 '사극 장인'으로 꼽히는 이준익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올빼미' 안태진 감독이 심사위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51세 늦깎이 신인 감독으로 우여곡절 끝에 첫 연출작을 선보인 안태진 감독. 17년 만의 첫 영화를 꺼낸 안태진 감독에 대해 "기성 감독 못지않게 내공을 드러낸 연출"이라는 평을 모았다. 한국 영화에서 처음으로 주맹증을 소재로 사극 영화를 만든 안태진 감독은 조명부터 스토리까지 세심하게 설계한 웰메이드 영화를 완성해 호평을 자아냈다. 안태진 감독 외에 '봉준호 루키'로 알려지면서 데뷔부터 많은 기대를 모은 '잠'의 유재선 감독과 저예산 독립 영화인 '화란'을 통해 자신의 연출색을 확고하게 드러낸 김창훈 감독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영화의 공기까지 바꾼, 조연상

올해 청룡영화상에서 가장 이목을 끈 부문이다. 주·조연을 오가며 연기 경계를 허문 충무로 '대세' 배우들의 과감한 도전이 결과적으로 역대급 라인업을 완성했다. 누가 받아도 이견 없는 박빙의 조연상. 청룡영화상 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영광의 주인공은 '밀수'의 조인성과 '거미집'의 전여빈이다. 두 배우는 한해 스크린을 빛낸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으로 등극하며 관객에게 최고의 순간을 안겼다.

올여름 선보인 '밀수'에서 전국구 밀수왕 권상사로 변신한 조인성은 올해 극장가 전국구 여심왕으로 감탄과 탄성을 자아낸 장본인이다. 짧지만 강렬한 한방을 안긴 조인성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영화의 공기까지 단번에 바꿔버린 능력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짧은 분량도 잊게 할 정도로 무서운 흡입력을 자랑한 조인성은 특유의 아우라와 뛰어난 피지컬로 관객의 집중도를 한껏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 심사위원은 "조인성이 칼에 맞아 쓰러졌을 때 극장 안 여성 관객들의 탄식으로 가득 찼다"고 곱씹었다. 하드캐리한 열연이 무엇인지 증명한 조인성의 존재감이다. 조인성과 함께 '밀수' 남우조연상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던 박정민도 "박정민이 또 박정민 했다"라는 극찬을 자아냈고 송중기 역시 "'화란'을 수면 위로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았다.

여우조연상은 그야말로 '거미집' 대 '거미집'의 경쟁이었다. 심사위원들은 "'거미집'의 전여빈이 나올 때마다 숨통이 트였다"라며 여우조연상으로 전여빈을 선택했다. '거미집'의 여러 캐릭터와 앙상블을 이뤄가는 지점에서 전여빈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것. 초반 확실하게 기세를 잡고 끌고 가는 전여빈은 송강호라는 큰 기둥 곁에서 조연이지만 주연 이상의 영화적 완성도에 크게 기여했다. '리틀 송강호'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충무로의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한 전여빈이다. 전여빈과 함께 2파전을 구축한 정수정 또한 가능성을 재발견했다. 연기돌이라는 편견을 진정성 있는 연기로 뛰어넘은 정수정은 '거미집'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한 배우로 성장했다는 평을 얻었다.

▶ 배우가 곧 장르, 주연상

눈알을 갈아 끼우고 광기의 열연을 펼치며 관객을 다시 한번 깜짝 놀라게 만든 명품 배우들이었다. 청룡영화상 주연상 부문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장악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이병헌과 '잠'의 정유미가 트로피를 차지, 올해 최고의 열연으로 관객에게 각인됐다.

지난 2016년 열린 제37회 청룡영화상에서 '내부자들'을 통해 데뷔 25년 만에 첫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은 이병헌은 7년 만인 올해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두 번째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가져가며 최고의 한해를 만들었다. 심사위원들은 "디스토피아라는 장벽이 컸던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끝내 보게 만드는 건 이병헌의 힘이 컸다"고 언급했다. 이병헌이라는 이름 하나로 관객을 극장까지 유도한 대목은 주인공으로서 최고의 능력이다. 배우가 곧 장르가 될 정도로 미친 열연을 펼치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재미를 끌어올린 이병헌. 선역과 악역의 경계를 오가며 관객에게 끝까지 여운을 남긴 이병헌의 연기가 올해 압권이었다는 평가다. 이병헌과 막판까지 접전을 펼친 '대배우' 송강호에 대한 평가도 심사위원들의 고민을 부추겼다. '거미집'의 중심에서 흔들림 없이 이야기를 주도한 송강호도 역시나 훌륭한 연기를 보였다는 것. 충무로의 세대교체에 나선 도경수, 류준열 또한 쟁쟁한 선배들 속에서 뛰어난 연기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여성 투톱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밀수'의 김혜수, 염정아 사이에서 무섭게 치고 올라온 '잠'의 정유미도 여우주연상의 관전 포인트였다. "특별한 장치 없이 배우 본연의 힘만으로 처음부터 엔딩까지 이끌었다"며 호평을 받은 정유미. 지나치게 과장되지도 턱없이 부족하지도 않은 최적의 선에서 공포를 빌드업한 정유미의 실력이 상당히 돋보였던 '잠'이었다. 일상에서 찾아오는 공포를 세심한 감정선으로 연기해 현실감을 극대화했다는 평도 많았다. 특유의 사랑스러움과 광기 사이의 줄타기를 노련하게 이어가며 '잠'의 중심을 잡은 정유미가 올해 청룡영화상이 픽한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했다. 정유미와 막판까지 경합한 '청룡의 여신' 김혜수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캐릭터 자체를 자신의 매력으로 버무려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평. 다만 '밀수'에서는 김혜수도 좋았지만 함께 앙상블을 이뤘던 주·조연들의 역할이 더 컸다는 평가에서 아쉽게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놓쳤다.

▶ 극장 영화의 의미, 감독 및 최우수작품상

위기의 극장가를 멱살 잡고 이끈 두 편의 여름 영화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연말 청룡영화상 무대에서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스크린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여성 연대의 힘을 과감하게 펼치고 상업적인 흥행까지 거머쥐며 가능성을 제시한 '밀수'가 최우수작품상을, 한국형 디스토피아를 제대로 알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이 감독상을 차지하며 올해 청룡영화상의 대미를 장식했다.

감독상을 거머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은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호불호가 큰 디스토피아 장르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무더운 여름 극장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김숭늉 작가의 인기 웹툰 '유쾌한 왕따' 중 2부인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새롭게 각색해 더 큰 세계관을 펼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 '박찬욱 키드'로서 박찬욱 감독 특유의 수직적 구도부터 섬세한 영상미, 노골적이지 않는 폭력묘사, 디테일한 상징과 복선 등을 녹여내며 한국식 디스토피아를 새롭게 펼쳐냈다는 지점에서 심사위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일반적인 재난 영화의 틀에 얽매이지 않아서 좋았다. 엄태화 감독만의 연출 방식으로 수준급 재난물을 만들었다"고 호평을 자아냈다.

청룡영화상의 클라이맥스인 최우수작품상은 연출, 스토리, 열연이 한데 어우러져 514만명을 사로잡은 '밀수'가 차지했다. '거미집'과 '콘크리트 유토피아'까지 초반 3파전을 구축했고 무려 3차의 투표까지 이어질 정도로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그 결과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벌어지면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밀수'가 올해 최고의 영화로 선택됐다. '밀수'는 70년대 성행한 해양 밀수를 모티브로 충무로에서 금기시됐던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 여성 주도 스토리에 해양 액션 활극을 버무리며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사로잡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심사위원의 마음을 붙잡은 대목은 관객을 극장까지 끌어오게 만드는 힘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라는 극장 영화의 매력을 온전히 충족한 작품이 '밀수'였고 그런 지점에서 올해 최우수작품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게 됐다. 심사위원들은 "수많은 OTT 플랫폼에서 양질의 콘텐츠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고 관객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재미를 점차 잊게 되면서 영화계 위기가 찾아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모을 수 있는 재미있는 영화다. 지금 한국 영화계가 가장 필요한 덕목은 돈이 아깝지 않은 양질의 퀄리티와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인데 '밀수'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평가했다.

◇ 청룡영화상 심사위원(가나다순) : 박인제 감독, 송준영 KBS예능센터 부장, 양우석 감독,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 이정혁 스포츠조선 엔터비즈팀 팀장, 이준우 핸드메이드 스튜디오 대표, 전용주 아이윌미디어 대표, 조진희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