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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도 수혈이 필요해"…아픈 고양이 살리는 헌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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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피 제공 위한 공혈묘…규제 공백에 동물권 논란도
반려묘 헌혈 모아 공혈묘 비중 줄이기…건강 검진은 '덤'

(서울=연합뉴스) 이율립 기자 = "헌혈해서 살릴 수 있으면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그렇게 해도 늘 아쉬움만 남죠."
고양이 구조활동을 하는 정모(54)씨는 지금도 2021년 11월 경기 양주의 한 유원지에서 고양이 일가족을 구조한 기억이 생생하다.
정씨는 일가족 중 생후 4개월로 추정되는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동물병원을 찾았다. 둘 다 새끼 고양이에게 치명적인 범백혈구감소증에 걸린 상태였다.
백혈구가 감소한 두 고양이를 살리려면 수혈이 필요했다. 정씨와 친분이 있던 고양이 반려인들의 도움으로 두 마리 모두 수혈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 마리는 세상을 떠났지만 다른 한 마리는 1년 6개월의 치료 끝에 건강을 되찾고 '벨라'라는 이름으로 입양을 가 새 삶을 살고 있다.
정씨는 24일 연합뉴스 통화에서 "나는 주변에 '집사'가 많아 구조활동 과정에서 도움을 받지만 일반 가정집 '집사'들은 고양이가 아파도 하루 이틀 안에 혈액을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벨라'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동물 역시 사람처럼 위급한 상황에 놓이면 수혈을 받는다. 반려인이 증가하면서 아픈 반려동물을 치료하기 위해 혈액이 필요한 경우도 점점 늘고 있다.
반려동물 헌혈 문화는 국내에 아직 정착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개의 경우 한국헌혈견협회나 반려견 커뮤니티, 동물병원의 헌혈 프로그램 등을 통해 어느 정도 네트워크가 구축돼 가고 있다.
반려묘의 헌혈 참여는 상대적으로 저조하다. 고양이는 개보다 환경에 예민해 헌혈하려면 통상 전신 마취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반려인들이 느끼는 부담이 한층 크다.
또 개의 경우 대형견 한 마리에서 얻은 혈액으로 소형견 3∼4마리를 살릴 수 있지만 고양이는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에게 공여해주기도 벅차 더 많은 헌혈묘가 필요하다. 고양이 혈액의 보관 기간이 길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이런 탓에 고양이 수혈이 필요한 경우 정씨처럼 알음알음 지인을 통하거나 공혈묘들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오로지 다른 동물에게 피를 제공할 목적으로 길러지는 공혈동물과 관련해서는 각종 논란이 있다. 동물권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관련 법률이 없어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전국 동물병원에 유통되는 개와 고양이 혈액의 대부분은 공혈동물을 키우는 한 민간 업체가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업체의 사육 규모는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이 업체는 약사법에 따라 반드시 요구되는 제조업 허가를 받지 않고 20년 넘게 운영한 사실이 지난해 말 알려져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다.
반려묘 헌혈수혈센터를 운영하는 VIP 동물의료센터 청담점 손지희 원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지난해 이맘때쯤 혈액을 공급하고 있던 혈액은행이 혈액 공급을 중단하면서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며 "혈액을 구하지 못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고양이들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공혈묘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어떠한 검사를 받으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동물 헌혈이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생명이 위독한 동물을 살리기 위한 공혈동물의 존재를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반려인들과 전문가들은 공혈묘를 완전히 없애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데에 공감하면서 공혈묘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반려묘의 헌혈을 늘려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고양이 헌혈센터를 운영하는 백산동물병원 김형준 원장은 "우리나라는 대부분 (공혈묘 피를 관리하는) 혈액은행에서 혈액을 공급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며 "인도적인 차원에서도 반려묘의 헌혈을 늘려 공혈묘의 비중을 줄여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손지희 원장은 "혈액은 장기간 보관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보유량 유지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헌혈이 유일한 방법"이라며 "건강한 반려묘들이 나중에 혈액이 필요한 경우에 또 건강한 친구들이 도와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반려인들이) 좋은 일에 동참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아픈 고양이도 살리고 공혈묘의 고통도 줄이기 위해 반려묘 헌혈에 나서는 이들도 있다.
서울 강서구에서 고양이 호랭이(4)를 키우는 한정인(32)씨도 그중 하나다. 한씨는 유기 동물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세 번의 반려묘 헌혈을 했다.
한씨는 "평생 피를 뽑히며 살아가야 하는 공혈묘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웠다"며 "반려묘 헌혈을 하려면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건강 검진을 하게 되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고양이 도리(7) 등 15마리의 반려동물과 살고 있는 배미영(50)씨는 반려묘 중 장애가 있거나 몸이 아픈 고양이를 제외한 4마리의 고양이가 1년에 1∼2회 헌혈하고 있다. "우리 고양이들이 헌혈하면 공혈묘들이 피를 덜 뽑아도 된다"는 게 배씨 얘기다.
배씨는 "내 아이(반려묘)의 피를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주인의 결정으로 주는 것이지 않나. 미안한 마음이 제일 크다"면서도 "다른 고양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반려묘들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한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게끔 건강하게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2yulrip@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