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이원만 기자] 차가운 아침 한기를 뚫고 경기도 이천의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선수촌을 찾은 건 지난 1일이었다. '2023 장애인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이 개최된 이천선수촌은 각계 각층의 인사들과 장애인체육 관계자, 국가대표 선수들이 총출동해 겨울 한파를 압도하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선수촌 한쪽에 마련된 컬링 훈련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바깥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5명으로 구성된 휠체어 컬링대표 선수단은 묵묵히 스톤을 투척했다. 얼음장만큼이나 차갑고 예리한 눈빛으로 스톤을 뿌리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세밀한 공예품을 가공하는 장인(匠人)처럼 보였다.
▶역주행 우승의 드라마를 쓴 '신생 대표팀'
중요한 국제대회 출전을 앞두고 연습에 피치를 올리고 있는 이들은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 휠체어컬링 대표팀이다. 2022년 3월 베이징 패럴림픽 이후 한국 휠체어컬링은 혁신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대한장애인컬링연맹은 '휠체어컬링의 국내외 경쟁력 확보와 종목 보급화, 신인 선수 증가 및 양성을 위해' 단일국가에서는 세계 최초로 지난해 9월부터 '코리아 휠체어컬링리그'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우승하는 팀을 국가대표로 선발한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을 통해 현재 한국 휠체어컬링 국가대표팀이 탄생했다. 바로 '2022 코리아 휠체어컬링리그' 초대 우승팀인 강원도 장애인체육회 팀(이하 강원도팀)이다. 사실 강원도팀은 당초 우승 후보까지는 아니었다. 창단(2021년 12월)한 지 만 1년도 안 된 신생팀이었다. 2022 베이징 패럴림픽 대표팀이었던 경기도장애인체육회 팀이 유력한 우승후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반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예선리그를 3위로 마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강원도팀은 특유의 끈끈한 팀워크와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며 '역주행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당당히 '초대챔피언' 타이틀과 함께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게 됐다.
▶한국을 뒤집고, 세계도 뒤집는다
이현출(스킵·37)과 양희태(서드·55) 장재혁(세컨드·52) 조은건(리드·52) 민영남(핍스·55)으로 구성된 강원도팀은 지난해 11월 3일 강릉컬링센터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경기도장애인체육회를 접전 끝에 2대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예상을 발칵 뒤집는 결과. 그러나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팀의 최연장자이자 플레잉코치 격인 핍스를 맡고 있는 민영남은 "팀이 처음 창단된 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우승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입상 정도만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감독님을 비롯해서 팀원들이 많은 훈련량을 통해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다. 강원도의 지원도 많았다. 그 결과로 따낸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첫 국가대표라 우승 순간에는 많이 울기도 했다"며 감격의 순간을 전했다.
휠체어 컬링팀은 혼성으로 구성된다. 강원도팀의 홍일점이자 리드를 맡고 있는 조은건은 "우리 팀의 강점은 무엇보다 팀워크다. 다른 팀의 경우에는 모여서 훈련하고, 끝나면 각자 뿔뿔이 흩어져 집에 간다. 하지만 우리 팀은 강원도의 지원 덕에 강릉에 오피스텔 두 채를 빌려 생활하면서 훈련한다. 같이 모여서 운동하고, 밥도 먹고 토론도 한다. 거의 함께 사는 셈이다. 호흡도 잘 맞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같은 우승을 통해 태극마크를 달게 된 강원도팀은 코리아 휠체어컬링리그가 끝난 뒤 곧장 이천선수촌에 입소해 '변신'에 매진했다. 깜짝 우승으로 태극마크를 따냈지만, 사실 국가대표 경험도, 국제대회 경험도 일천했기 때문이다. 기술과 경험 모든 면에서 진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천 훈련 후 대한장애인체육회와 장애인컬링연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스웨덴(12월)과 스코틀랜드(1월)로 대회 출전을 겸한 전지훈련을 다녀오기도 했다.
팀에서 가장 국제경험이 풍부한 양희태는 "지금까지 세 번의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 2개를 따냈는데, 개인적으로는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 지금 우리 팀이 전지 훈련 등을 통해 국제적인 수준으로 올라와 있다. 우리의 작전과 호흡이 더 맞아떨어지면 충분히 메달권의 성적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스킵 이현출은 "국가대표라는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걱정도 된다. 3월에 열리는 세계선수권에서 우리나라가 최근에 입상에 계속 실패했다. 동료 선수들이 모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만큼 좋은 성적이 나왔으면 좋겠다. 포디움(시상대)에 오르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과학적 분석 + 승부사 본능, 2026 이탈리아 패럴림픽까지 본다
휠체어 컬링대표팀은 강원도를 대표해 나선 2월 장애인동계체전에서도 믹스더블, 4인조에서 역전 드라마를 쓰며 2관왕에 올랐다. 승리의 기운을 안고 22일 세계 휠체어컬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캐나다 리치몬드로 출국한다. 현지에서 시차 적응과 컨디션 조율을 마친 뒤 3월 3일부터 12일까지 열전에 들어간다. 이번 대회는 총 12개 팀이 참가해 예선 풀리그를 펼친 뒤 상위 6개 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다. 예선리그 1, 2위는 4강에 직행하고, 3위와 6위 그리고 4위와 5위가 6강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방식. 한국남자프로농구의 6강 플레이오프 시스템과 비슷하다.
강원도 팀을 이끌고 있는 박권일 감독은 "이번 대회는 새 국가대표팀이 처음으로 나가는 세계선수권이자 2026 패럴림픽 출전 포인트가 걸려있는 첫 국제대회다. 패럴림픽 준비를 위한 작업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중요한 대회다"라면서 "지난해말부터 이어진 이천 선수촌 집중훈련과 전지훈련 등을 통해 우리 대표팀의 기량은 많이 올라와 있다. 관건은 컨디션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다"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최첨단 장비와 스스로 개발한 데이터 분석시트를 통해 신생팀 강원도장애인체육회를 코리아컬링리그 초대 우승팀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훈련 덕에 전체적인 스로우 성공률이 많이 향상됐다. 전지훈련을 통해서는 생소했던 해외 경험을 쌓았고, 미비점과 보완점을 체크했다"면서 "무엇보다 우리 선수들은 연습보다 실전에서 더욱 힘을 발휘하는 스타일이다. 다들 배짱이 강하다. 당초 목표는 플레이오프 진출이었는데, 현재 컨디션이 잘 유지되면 메달까지도 노려볼 만하다"며 선전을 다짐했다.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