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러시아를 뒤흔든 혁명적 걸작들이 서울에 왔다.
지난해 12월31일부터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 2관에서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전'은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미술의 혁명을 일으켰던 아방가르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스탈린 집권 이후 퇴폐미술로 낙인 찍혀 종식을 고했다. 그리고 동서 이념 대립과 냉전에 의해 세월진 철의 장막 속에 60년 이상 가려져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20세기 현대미술, 건축, 디자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사조로 평가받는다.
지난 2018년 영국 왕립예술원과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러시아 혁명 100주념을 기리는 차원에서 관련 전시가 대규모로 열린 바 있다. 이에 유럽과 미국 등 서구권 중심으로 굳어져 있던 유럽 모더니즘 미술에 대응하는 비서구권 아방가르드 미술의 국내 소개도 시급하다는 인식이 싹 텄으며, 때마침 한러 수교 30주년이라는 시기적 특수를 맞이해 본 전시가 기획됐다. 전시는 오는 4월17일까지 계속된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거장전들이 해외에서 기획된 전시를 그대로 가져와 전시하는 기존 관행과 달리, 본 전시는 김영호 예술감독 휘하 국내 러시아 미술 전문가와 전시기획 전문가들이 발로 뛰어 직접 기획한 전시여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이렇게 전시된 작품들은 러시아 국립미술관인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소장품이 주가 된다. 아울러 크라스노야르스크 미술관, 미즈니 노브고로드 미술관, 연해주 미술관 등에서도 작품을 보내 힘을 합쳤다. 이들 작품 모두, 러시아 연방 문화부에 문화재로 등록 관리되고 있는 국보급 미술품들이다.
작품들은 지난 12월 20일 대한항공을 통해 인천국제공함에 도착하여 미술품 전용 운송 무진동 차량으로 미술관 수장고에 반입되었다. 26일에는 러시아 미술관 측 호송인 2인이 도착하면서 전시를 위한 작품 컨디션 체크 작업을 마쳤다. 컨디션 체크 작업이란, 작품이 반입될 때와 나갈 때 처음과 마지막의 상태를 점검해서 작품 상태가 이상이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확인을 마친 작품들은 전시 채비를 마치고 지난 31일 본격적으로 전시의 막을 올렸다.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는 '즉흥', '인상', '구성' 등의 시리즈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러시아 활동 시기에 남긴 '즉흥' 시리즈가 소개된다.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대표작을 포함해 입체-미래주의 경향의 작품도 함께 출품되었다. 이외에도 '광선주의', '신원시주의'로 유명한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작품들도 소개된다. 현대 사진예술과 광고디자인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의 대형 회화작품 역시 이번 전시의 백미로 손꼽힌다.
전시 예술감독을 맡은 중앙대학교 김영호 교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퇴폐예술로 낙인 찍혔으나 50년 뒤에 미니멀아트로 부활한 역설적 창조의 예술이었다"며, "1910~20년대 러시아 전위적 예술운동은 한국의 추상미술과 단색화의 탄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21세기 문명사적 전환기에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번 전시는 관람객의 전시이해와 참여를 위해 작은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어린이를 동반한 관람객을 위한 체험활동지가 제공되며,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에게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주요 작가그룹이었던 '다이아몬드 잭'을 연상시키는 트럼프 카드 모양의 미션카드로 현장에서 미션을 풀어보며 전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관람에 추천되는 오디오 가이드는 영화배우 이제훈 씨가 참여해 작품과 작가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한편, 이번 전시는 대중의 문화예술 향유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관람객의 자유로운 작품 촬영이 허용될 수 있도록 작품 계약단계에서부터 섬세하게 배려되었다. 특히 출구에 배치된 포토 프레임 카드 등을 활용해 자신만의 추억사진을 마련할 수도 있다. <이재훈 기자 sysphe@spo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