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이원만 기자] 잠자던 사자가 드디어 눈을 번쩍 뜨고 우렁차게 포효했다. 그러자 아무도 그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국내 선수의 자존심을 등에 진 강민구의 혼신을 다한 저항도 프레드릭 쿠드롱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쿠드롱이 프로당구투어 PBA 4차 대회에서 드디어 진면목을 보여주며 첫 우승을 달성했다.
쿠드롱은 14일 밤 서울 강서구 메이필드 호텔에서 열린 'TS샴푸 PBA 챔피언십' 결승에서 강민구를 세트스코어 4대2(15-6, 15-11, 15-5, 9-15, 3-15, 15-3)로 물리치며 우승 상금 1억 원의 주인이 됐다. 쿠드롱은 7전 4선승제의 결승전에서 1~3세트를 손쉽게 따내며 상대인 강민구를 공포에 젖게 만들었다. 파워와 정확성을 겸비한 그의 완벽한 샷에 관중들은 전율마저 느낄 정도였다. 공략 루트가 정해진 공 배치는 놓치는 법이 없었고, 강민구가 수비적으로 남겨놓은 이른 바 '난구'는 기발한 시도로 풀어냈다. 관중들은 점점 그의 묘기에 가까운 샷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벼랑 끝에 몰렸던 강민구의 저항도 드라마틱했다. 강민구는 준결승에서 1차 대회 결승 상대였던 필리포시스 카시도코스타스를 물리치며 '리벤지'에 성공하고 결승에 올라왔다.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강민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뚝심을 앞세워 4, 5세트를 따내며 세트스코어 2-3으로 쿠드롱을 압박했다. 사실 실력과 경기 운용능력 면에서 강민구 역시 우승자의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강민구는 불운했다. 하필 쿠드롱이 이번 대회에 최전성기급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드롱은 마지막이 된 6세트를 불과 3이닝 만에 끝내버렸다. 강민구가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었다.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사실 수많은 당구 팬들은 이러한 쿠드롱의 모습을 진작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프로당구 PBA가 처음 출범할 때 간판으로 내세운 선수가 바로 쿠드롱이었기 때문이다. 쿠드롱은 이미 세계 3쿠션계의 최정상에 올랐던 인물이다. 토브욘 브롬달(스웨덴)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등과 함께 '세계 4대 천왕'으로 불렸다.
하지만 다른 3대 천왕과 달리 쿠드롱은 모험에 나섰다. 세계 아마추어 최강의 타이틀을 뒤로하고 새로 출범한 '프로당구 PBA'에 뛰어들며 '당구 프로화'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적응이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다. 달라진 경기방식과 룰에 적응해야 했고, 무엇보다 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시차와 환경에도 적응해야 했다. 결국 1~3차 대회에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에 그쳤다. 1, 2차 대회에는 16강을 넘지 못했고, 3차 때는 32강에도 오르지 못했다.
자존심이 구겨질 법도 했지만, 쿠드롱은 담담하게 샷을 가다듬으며 컨디션을 조율했다. 그는 "1차 대회 때는 해외 매치를 마치고 참가하느라 경기 5시간 전에 입국해서 컨디션 조절을 못했다. 또 한국 선수들도 예상보다 더 기량이 뛰어나 2, 3차 때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서도 목 근육통이 있었지만 컨디션을 잘 조율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은 컨디션 조절이 관건이었다. 이미 갖고 있는 기량으로는 적수가 없는 쿠드롱이 PBA의 여러 제반 환경에 적응하느라 1~3차 대회에 좋은 성적을 못 낸 것이다. 3차 대회가 끝난 후 쿠드롱은 고국 벨기에로 돌아가지 않고 국내에 남아 계속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가 4차 대회 우승이다. 이제 우승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독주를 시작할 수도 있다. 각성한 쿠드롱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쿠드롱의 시대'가 열렸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