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이원만 기자]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그렇게 터질 줄은 몰랐네."
어느 현역 프로팀 농구 감독의 말이다. 그는 최근 '예능 늦둥이'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허 재 전 국가대표 농구팀 감독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편이라고 했다. 허 전 감독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다 사석에서도 자주 만났지만, 막상 TV를 통해 보게되니 미처 몰랐던 색다른 모습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레전드'로 불렸던 스포츠 스타들이 최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한다. '스포츠스타→예능인' 변신의 원조이자 가장 성공한 케이스는 역시 한국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자리잡은 강호동이다. 그는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씨름 천하장사'의 이미지를 지우고 예능에 투신해 당대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왔다. 그 이후 한 동안 몇몇 선수 출신 '예능 새내기'들이 등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스포츠스타 출신 예능인들이 방송가를 장악하고 있다. '불세출의 골리앗' 서장훈의 성공적인 '예능스타' 변신이 대표적이다. 이어 '2002 한일월드컵 영웅' 안정환도 매끄러운 화술과 재치를 앞세워 '대세 예능인'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면서 늘 '새 캐릭터'에 목마른 방송가에서 왕년의 스포츠스타들에게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트렌드 덕분에 현주엽 LG 세이커스 감독과 허 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자리를 꿰차며 인기몰이중이다. 향후 점점 더 '방송 잘 하는 스포츠 레전드'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렇다면 스포츠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과거에는 스포츠스타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주를 이뤘다. 스포츠의 순수한 가치와 그간 힘겹게 쌓아올린 선수 이미지를 장난스럽게 소비해버린다는 식의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구세대'의 의견이다. 최근에는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특히나 이미 은퇴한 선수 혹은 감독 자리를 내려놓은 '레전드'가 새로운 분야에 진출해 본인의 재능을 펼쳐내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한 농구인은 "방송에서 나오는 허 감독의 모습은 사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모습이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 줄은 몰랐다. 특히 젊은 층에게 다시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니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긍정적 시선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러한 분위기 덕분에 스포츠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함께 커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한 프로축구 감독은 "스포츠 선수 중에 숨은 재능(끼)을 갖고 있는 이가 많다. 스포츠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듯이 자신의 또 다른 재능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은 긍정적"이라며 "특히 이들은 자기 종목을 시청자들에게 더욱 널리 알리는 등 이른바 홍보대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당 종목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면 스포츠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현실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현주엽 감독과 LG 선수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단체로 나온 이후 선수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팬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LG 구단 관계자는 "처음 출연 제의가 왔을 때 감독님의 수락 조건이 바로 '선수와 함께 나간다'였다. 비시즌 훈련 휴식일을 이용해 방송에 나가면 팬 서비스도 하고 구단을 알리는 효과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구단도 그래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스포츠스타들의 예능계 진출은 변화된 세태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스포츠계에서는 이를 통해 침체된 국내 스포츠 전반의 인기 부활의 계기가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