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박찬준 기자]한국축구의 가장 큰 콤플레스는 '기술'이었다.
십수년간 아시아 무대를 호령하며 세계에 도전했지만, '기술 부재'라는 평가 속 눈물을 흘렸다. 물론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은 "한국 선수들의 기술은 부족하지 않다"고 했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신화의 해법은 한국축구의 가장 큰 무기였던 기동력, 그리고 스피드의 극대화였다. 차범근을 시작으로 서정원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을 거쳐 최근의 손흥민까지 유럽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이 바로 이 기동력과 스피드를 장점으로 한 측면 자원에 집중됐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섬세한 기술은 한국축구의 영역이 아니었다. 월드클래스 반열에 오르고 있는 '한국축구의 보물' 손흥민 조차 테크닉이 아주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시절부터 한국축구는 스페인식 점유율 축구로 패러다임을 바꿨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은 아예 후방부터 빌드업을 추구하고 나섰지만, 2019년 아시안컵에서 실패를 맛봤다. 역시 선수들의 기본적인 기술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물론 유소년에 대한 투자가 이어지며, 2000년대 이후 기술이 좋은 선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좁은 공간을 개인기로 벗겨낼 수 있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볼 수 있는 테크니션까지는 아니었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한국축구가 세계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기술자가 필요했다. 드디어 그 답을 찾았다. '슛돌이' 이강인(발렌시아)이다.
2019년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 나선 이강인은 완벽한 원맨쇼로 한국에 16강 티켓을 안겼다. 사실 1, 2차전은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이강인이 100%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에서 뛰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놀라운 키핑력과 탁월한 왼발킥을 통해 이강인만의 특별한 재능을 볼 수 있었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그 보다 더 위였다. 마침내 이강인이 1일(이하 한국시각) 아르헨티나와의 3차전(2대1 승)에서 우리가 원했던, 그 모습을 보여줬다.
정정용 감독은 아르헨티나전에서 3-5-2 카드를 꺼냈다. 눈여겨볼 것은 이강인의 위치였다. 이강인을 투톱에 가깝게 내세웠다. 형태는 1차전 포르투갈과 비슷했는데, 당시 이강인을 두 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했던 것과 달리 이강인의 위치를 더욱 올렸다. 정확히는 3-5-1-1, 이강인의 수비부담을 줄여 그의 공격 능력을 극대화하겠다는 의도였다. 정 감독의 의도는 완벽히 적중했다. 수비라는 굴레를 벗은 이강인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상대는 이 대회 최다 우승국이자, 2차전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 포르투갈을 2대0으로 완파한 아르헨티나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르헨티나에는 특출난 선수들이 넘친다. 이번 대회에 나서는 선수들 중에도 빅리그, 빅클럽의 주목을 받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이날 가장 빛나는 별은 단연 이강인이었다. 한국의 '10번' 이강인은 10번의 상징과도 같은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의 후예들을 상대로, 완벽한 테크닉으로 경기를 지배했다.
이강인의 볼 다루는 능력은 차원이 달랐다. 전반전 37분 오른쪽 측면에서 아르헨티나 선수 4명에게 둘러쌓인 장면을 벗어나는 것은 단연 백미였다. 절묘하게 등을 진 상태에서 놀라운 발재간으로 빠져나오며 패스를 연결해낸 것은 이강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워낙 볼 소유에 자신이 있다보니, 상대에 막혀도, 혹은 공간이 없어도 새로운 루트를 찾아냈다. 우리가 이강인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점유율 축구 혹은 빌드업 축구를 추구했지만, 상대의 압박에 대한 해법은 언제나 백패스 혹은 횡패스였다. 최근 대표팀의 경기력이 답답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이강인은 달랐다. 개인기로 압박을 풀어내며, 앞 쪽에 있는 선수에게 볼로 연결했다. 팬들이 가장 보고 싶은, 원하는 공격 전개였다.
현란한 탈압박 후에는 정교한 킥이 이어졌다. 이강인은 체구는 작지만 임팩트가 대단히 좋다. 전반 두차례의 슈팅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동작이 크지 않아도 공이 정확히, 강하게 나간다. 아직 어리지만 이강인의 왼발은 이미 수준급이다. 아르헨티나전 전반 오세훈의 선제골을 도운 이강인의 크로스는 조금 과장해, 데이비드 베컴의 크로스를 보는 듯 했다. 궤적이나 세기 모두 완벽했다. 이강인의 킥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세트피스였다. 이강인이 차는 프리킥 혹은 코너킥 어김없이 우리 선수들에게 연결된다. 1, 2, 3차전 모두 그랬다. 거리에 상관없이 보내고 싶은 곳에 정확히 볼을 보냈다.
이강인은 이날 혼자 힘으로 아르헨티나를 농락했다. 당황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흔들렸고, 이강인을 막기 위해 거친 반칙을 연발하며 무너졌다. 후반 추가시간 이강인이 벤치로 향할 때 관중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날 이강인이 얼마나 독보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이강인 혼자 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이강인은 자신의 기술을 앞세워 경기 전체를 지배했다. 수많은 천재들이 한국축구를 수놓았지만, 이강인은 진짜다.이전까지 조직력을 무기로 강팀을 상대하던 한국축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테크니션' 이강인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통해 나타났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