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의 최고참 이범호(38)는 타격 이후 1루로 전력질주하지 못한다. 뛰긴 뛰지만 빠르게 걷는 수준이다. 일명 '산책 주루'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올해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도중 찾아온 왼쪽 햄스트링(허벅지 뒷 근육) 재발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김기태 KIA 감독은 "뛰는 것을 보면 불안하다. 다치지 않길 바라야 한다"고 말했다.
주루가 안되는데 1군 무대에서 지명타자로 타석에 나서고 있는 건 역시 팀 사정 때문이었다. 타자들의 극심한 타격부진으로 인해 지난 10일 NC 다이노스전부터 1군에 콜업 됐다. 이범호의 역할은 해결사였다. 경기 후반부 득점찬스가 왔을 때 대타로 출전, 한 방을 날려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NC와의 2경기에선 나란히 한 차례씩 타석에 서 각각 삼진과 아웃으로 물러났다.
역시 선발 체질이었다. 지난 12일 SK 와이번스전부터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13일에는 이범호에게 바랐던 장면을 연출했다. 당시 좀처럼 SK 선발 박종훈을 공략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드라마와 같은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0-4로 뒤진 7회 박종훈의 포심을 잡아 당겨 좌측 담장을 넘겼다. 정확한 타격 폼이 형성되지 않았지만 프로 20년차 구력으로 생산해낸 홈런이었다. 이범호는 9회에도 희생플라이로 추격점수를 올리며 제대로 뛰지 못해도 왜 그가 타석에 필요한가를 보여줬다.
기량을 떠나 이범호가 현재 팀 내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주전멤버가 부상과 부진으로 대거 2군으로 내려간 사이 그 공백을 메운 '영건'들이 기댈 수 있는 베테랑이 되고 있다. 올 시즌 개막전부터 줄곧 '핫코너'를 지키고 있는 최원준을 보면서 "이젠 내가 없어도 되겠네"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하지만 이범호의 희생은 젊은 선수들의 투지를 더 끌어올리고 있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이범호 스스로도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자신이 야구인생에서 세웠던 개인통산 2000경기, 300홈런(달성), 1000타점(다성)에 13경기만 남겨뒀다. 일정 부분 수긍한 '은퇴'를 눈앞에 둔 올 시즌 "내려오더라도 잘 내려와야 한다"며 스스로 한 이야기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