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퇴장이었다. 그들의 월드컵은 '실패'가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월드컵에선 희비가 교차한다. 조별리그에 참가한 32개 국가 중 절반이 짐을 싸야 한다. 기본적인 전력 차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일어나는 이변, 그리고 끝까지 싸우는 투혼은 축구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아쉽게 조별리그에서 좌절했지만, 페루와 아이슬란드는 '유종의 미'를 거뒀다. 앞서 최종전에서 최선을 다한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도 마찬가지다.
덴마크와 프랑스는 26일(이하 한국시각) 러시아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년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C조 최종전에서 0대0으로 비겼다. 이번 월드컵에서 38경기 만에 나온 첫 '0대0 무승부'였다. 이미 16강이 확정된 프랑스와 유리한 위치에 서있던 덴마크. 최선을 다해 싸울 동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경기장을 찾은 7만8011명의 관중들은 '축구 축제'를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
같은 시각 소치 피스트 스타디움에선 페루와 호주가 치열하게 싸웠다. 호주는 16강 진출이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페루는 2패로 이미 16강이 좌절됐지만, 마지막 1승을 위해 전력질주했다. 페루는 힘겹게 남미 예선을 통과했다. 안 좋은 성적으로 예선전을 시작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5위로 플레이오프에 오른 끝에 뉴질랜드를 꺾고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이후 36년 만이었다. 페루는 난적 프랑스, 덴마크를 만나 2연패를 당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페루는 전반 18분 만에 골을 터뜨렸다. 요시마르 요툰의 정확한 긴 패스를 파올로 게레로가 페널티박스 왼쪽에서 잡았다. 쇄도하던 안드레 카리요에게 정확한 크로스를 올렸고, 카리요는 논스톱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36년 만에 출전한 월드컵에서 만들어 낸 이번 대회 첫 골. 기세를 올린 페루는 후반 5분 게레로의 쐐기골로 경기를 2대0 승리로 마무리했다. 월드컵 승리는 1978년 아르헨티나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이란에 4대1로 승리한 이후 약 40년 만이다. 최종전에서 페루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다.
D조 최약체로 꼽히던 아이슬란드도 16강 티켓을 따내지 못했다. 아이슬란드는 지난 유로 2016 대회에서 8깅 진출에 성공하며 기적의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번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7승1무2패로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아이슬란드는 축구 환경이 좋지 않다. 추운 날씨에 인구는 약 33만8000명(세계 179위)에 불과하다. 프로 축구 선수는 약 120명 뿐이다. 대표팀 선수들이 축구와 함께 부업을 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슬란드는 세계 축구 무대에서 존재감을 알렸다.
이번 월드컵도 그들에게는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크로아티아, 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 등 강국들과 함께 속한 D조. 1차전에선 아르헨티나를 높은 키와 수비로 꽁꽁 묶으며 1대1로 비겼다. 나이지리아에 0대2로 패하면서 16강행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리고 27일 조 1위 크로아티아와의 최종전에서도 투지가 넘쳤다. 아이슬란드는 전반 20분 동안 볼 점유율이 30%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수비 후역습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특히 세트 피스 상황에서 높은 타점을 활용해 크로아티아를 괴롭혔다. 후반전에는 여러 차례 위협적인 슛이 나왔다. 스베리르 잉가손의 헤더가 크로스바를 맞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크로아티아에 1대2로 패했다. 표면상 1무2패(승점 1점)의 초라한 성적. 그러나 아이슬란드가 보여준 투지는 한마음으로 응원한 자국팬들의 바이킹 박수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월드컵에 참가한 국가들은 각자 다른 사연과 스토리를 품고 도전한다. 탈락이 확정된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다. A조 사우디는 최종전에서 24년 만에 월드컵 본선 승리를 거뒀다. B조 모로코도 20년 만의 월드컵 본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포르투갈(0대1 패), 스페인(2대2 무) 등 강팀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때 얻어지는 '유종의 미'. 월드컵 본선에 오른 국가들이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품격이자 축구팬들을 위한 선물이 아닐까.선수민 기자 sunsoo@sportschosun.com